물에 빠진 사람의 지푸라기

하루에 하나씩

by 김이람

올해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내가 그리는 궤적은 생년월일시가 정한 축을 한참 비껴가고 있다는 건 이미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확인했지만 어차피 심심풀이니까 뭐, 하며 신년운세를 클릭하고 만다. 내년에도 '내가 그리는 궤적은 (후략)' 하며 똑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사실 심심풀이란 건 거짓말이다. 내용이 흉흉했을 때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하는 소리일 뿐, 좋은 말이 나오면 온 정성을 다해 믿어볼 생각이었다.


심심풀이라고 하면서 신년운세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이라서다. 세상천지 연초에 좋은 말 들어 기분 나쁜 이가 어디 있겠느냐 마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푸라기'가 절실하다. 내 감정 그래프는 원래부터 폭이 커 스스로를 '롤러코스터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감정의 부침이 유난히 길었던 지난해를 겪으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매일 무너져 있기만 한 것도 아니고 가끔 좋을 때도 있었으니까. 이런 아리송한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가 '선생님처럼 혹시 내가? 하면서 오는 분들 많은데 진짜는 그런 정도가 아니에요.' 하는 심드렁한 핀잔만 들을까 봐, 혹은 그 의혹이 진짜로 바뀔 때의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직도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오늘도 어푸어푸 중이다. 사주팔자 들여다보는 것보다 의사를 만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란 건 알고 있지만.




멘탈이 약해서, 별일 아닌 것도 별일처럼 느껴지는 호들갑 제형이라서, 혹은 내 손에 쥔 건 보지 못하고 남의 것만 보며 군침 흘리는 못난 사람이라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소리를 마주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올리면 퍼뜩 정신이 든다. 내가 나에게까지 그런 말을 뱉어낼 필요는 없다.


사실이 그렇다. 다들 그렇게 살지만 버틸 수 있는 중량은 각자 다를 수 있고, 마음의 상처에도 불가항력이 있을 수 있다.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나라고 해서 감정이 일어난 원인도 나란 법은 없지. 그러니까 그저 다 끝났고 다 잘될 거야란 말로 이젠 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싶었다.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 올해야말로 '운수대통. 당신을 괴롭히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 이 말이 꼭 듣고 싶었다.




올해는 기존의 판이 흔들리며 가치관이 깨지고 변화가 많을 것입니다. 머무르면 흉하고 움직이면 길합니다. 감정기복과 번아웃, 혈압을 조심하세요.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올해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엉망진창이 될 거랍니다 라는 -듯이 들리는- 글자들은 심심풀이란 말론 쉽게 잊히지 않았다. 얼마 전 월세 재계약 교섭을 성공하고 좋아하던 내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머무르면 흉하다니, 이사를 갔어야 했나 봐. 운명이 이사 가라고 판까지 깔아줬는데 그걸 왜 일일이 뒤집어서는. 불안은 희망을 원망으로 바꿨다.


안 보느니만 못한 올해의 신탁 때문에 새 지푸라기를 찾아야만 했다. 검색창에 개운, 액땜, 이런 말들을 몇 번 집어넣고 나온 결과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동이 어렵다면 정리정돈으로 운의 흐름을 좋게 하고 변화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니 미리 선수를 치라는 건가. 앉은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내 바닥에 널브러진 요가매트, 말라비틀어져가는 유자, 결로로 피어난 창틀 곰팡이. 울적할 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얼마 안 되는 기분 좋은 날엔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일로 시간을 떠내려 보낼 수 없어서. 제때 놓아버리지 못한 것들 모두가 얌전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앞으로 다가온다는 거센 변화가 어떠한 것이 될지, 정말 오긴 오는지 아직 모른다. 다만,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을 그냥 두는 것이 나를 좋은 길로 이끌 거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낮시간, 나와 물건들은 이 방에서 각자의 부피만큼 공간을 차지하며 서로의 숨결을 덧입힌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물건들엔 나의 우울한 한숨까지 덕지덕지 들러붙어 나와 같이 누가 누가 더 쓸모없는지를 겨루며 이 공간을 한결 더 울적한 풍경으로 만든다.


올해의 운세 때문이 아니라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감정의 침잠에서 스스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제껏 거기 그렇게 오도카니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나와 함께 가라앉아 가던 것들과 하루에 하나씩 헤어지려 한다.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주고 더는 필요 없어진 것들을 떼어낸 만큼, 바람도 앉아 쉬어갈 단단한 그루터기가 내 마음에도 생기기를 기대한다.


이 이야기는 물에 빠진 사람과 지푸라기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