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또 돌고
사사키 후미오의 책을 읽고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필요 없으면 버리고, 망설여져도 버리고, 설레지 않아도 버리라길래 아직 말짱한 옷과 카펫, 이불 같은 것들을 몽땅 내다 버린 적도 있다. 설레는 걸 어떻게 버리나 싶었는데 다행히 처음부터 설레서 산 게 없어 쉽게 버렸다. 숨 쉴 공간이 생긴 방안을 내려다보며 앞으론 청소도 쉬워질 테고 내 삶이 내 통제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왔다며 뿌듯해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아쉬워지는 순간이 올 줄도 모르고.
책에 나오는 것 같은 예쁜 미니멀리즘에는 '질 좋은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 전제됐다. 자주 빨아도 쉽게 너덜거리지 않는 셔츠와 겨울 내내 한벌만 입어도 보풀이 일지 않는 코트, 디자인성 높은 다기능 가구 같은 것들 말이다. 나 혼자 누워있기도 빠듯한 방, 허리띠를 바싹 졸라맨 생활자의 삶에, 없어도 살아지는 그런 설렘을 들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설레진 않았지만 - 그래서 쉽게 처분할 수 있었지만 - 불필요한 것도 없었다. 버린 것과 비슷한 것들을 다시 사들이면서야 깨달았다. 이미 그 삶을 사는 이를 따라 한다고 해서 나 역시 그런 삶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때의 씁쓸한 기억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성만을 남겼다. 독립하고 3년 차인가 그랬으니 지출도 꽤 저릿했을 것이다. 끌어안고 살아온 것들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있어 하루에 하나씩 정리정돈 하는 일 -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것까지 포함하지만 - 이 그리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이것도 잘 안된다. 한참을 이것저것 손에 들었다 놨다 하다 보니 피곤도 하고 짜증도 나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빨간 저금통 뒤에 숨어 자기도 저금통인척 하던 작은 병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가 묻는 게 싫어 잔뜩 세운 손끝으로 집어 살짝 흔들어 보았다. 동그란 흰색 알약들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절절 끓는 여름을 여러 번 지냈는데도 용케도 녹지 않았네. 비타민이 자율신경 조절에도 도움이 되던가? 눈에 보인 김에 이제라도 다시 먹어볼까 했다가 뒷면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나래도 사용기한에 2022년 12월 - 보존상황에 따라 2023년 1분기의 동의어 정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 이라 적힌 걸 삼킬 용기는 없다.
이건 혼자 자취할 때 샀던 비타민이다. 내게 남아있던 미니멀리즘의 실낱같은 동경이 이걸 사게 만들었다. 메뉴 선택의 고민 없이 내게 필요한 영양소를 안정적으로 섭취할 수 있고, 내가 약속한 생활 루틴으로 스스로를 돌보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언니에서 이모라 불리게 된 지 이미 오래지만, 나를 위해 뭔가 하고 있을 땐 마치 꽤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다. 꼬박꼬박 먹다 보면 피부가 좋아져 화장품을 덜 사도 되지 않을까 하는 판타지도 있었다.
그랬던 그게 이제 발견되었으니. 기대와 달리 폭망길을 걸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창대한 시작과 달리 끝맺음은 흐지부지할 때가 많은 나는 참 꾸준히도 꾸준하지 못한 사람이다. 약간 기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금방 체감할 수 없는 비타민의 효과는 그런 나를 바꾸지 못했다. 침대에 누웠다가 '아 맞다! 비타민!' 하고 일어난 적도 많았는데, 그나마 시간이 지나자 내추럴하게 다음 날로 미루게 됐다. 그다음? 내일이 모레 되고 모레가 글피 되며, 오래된 비타민들은 소리소문 없이 수명을 마치고 차례로 숨을 거뒀다.
지키지 못한 나와의 약속. '내가 또 나 했다는 것'의 증거가 이 비타민이었다. 때때로 오래된 비타민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꾸준하지 못한 것만 꾸준한 나는 계속해서 비타민을 잊은 척했다. 작심삼일이 낯선 말은 아니었지만 매번 확인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라. 사용기한이 최소 2년은 지났겠구나 어림짐작하면서도 꺼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망각과 회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만 했을 뿐.
마침 이렇게 눈에 띄어버린 것은 이제야말로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게 위로가 되는 물건도 아니고 더 이상 쓸모도 없는 것. 무엇보다도 제 기능을 잃은 비타민은 무기력하던 때의 나 자신과 똑 닮아있다. 가장 먼저 흘려보낼 것으로 꽤 괜찮은 선택 아닐까 싶다.
유리병의 뚜껑을 비틀었다. 아주 오랜만에 열린 병 안으로 올해의 공기가 들어갈 틈도 없이, 쓰레기통을 열고 병을 기울여 알약을 우르르 털어 넣었다. 잡동사니 바구니 안에 구겨져 있던 다른 영양제들도 끄집어내어 탈탈 붓고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았다. 내 안을 채우던 실패의 기억과 줄곧 따라오던 부채감도 함께.
어딘가 홀가분하다.
그렇게 비타민과 안녕을 고한 지 딱 일주일 째 된 날, 집에 택배가 도착했다. 쇼핑 사이트에서 받은 700엔어치 기간한정 포인트의 소멸시기가 다가왔는데 비타민을 막 버린 참이라 그런가 새 비타민 생각이 났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비타민이 난 자리는 다시 비타민이 들어왔다. 웃기지만 그렇게 됐다. 요즘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면 소량의 물과 세 알의 연노랑 비타민을 삼킨다. 이번엔 실패하지 말아야지. 내 심신의 안녕과 나를 위한 이 작은 루틴이 부디 길게 길게 이어지기를 빌고 또 다짐하면서.
- 지난주의 결과보고서
오래된 비타민, 서랍 속 콘택트렌즈, 화장품 빈통, 소파 아래 예쁜 과자상자, 외투 주머니 속 마스크, 화분 하려던 빈통, 다 먹은 드립커피 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