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염쟁이 유씨’를 보고
“경사는 몰라도 초상은 그냥 지나치면 절대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나름 순종하기 위해 지인의 상가(喪家) 조문을 빠지지 않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다. 이른바 호상이라는 노환부터 친구의 요절, 병사(病死), 동기 가족의 극단적 선택 등 다양한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마주했고 상갓집의 분위기가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주제로 한 연극을 보고 나니 오히려 죽음에 대한 어색함이 커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는 관객의 연기참여와 대화 유도를 통해 몰입이 배가되면서 죽음을 더욱 근접 관찰한 연유이지 않을까 싶다.
염쟁이 유씨는 대한민국 연극계에서도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명품 1인극이다. 15년간 각종 상을 휩쓸었고, 호평을 얻은 이 연극이 전국순회를 하면서 내가 사는 고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솔직히 시간과 수고를 조금만 더 들인다면 볼 수 있는 공연이 얼마나 많겠냐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공연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연극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대대로 염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유씨는 물려받기 싫어했던 가업이었지만 40년 이상 평생을 염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험을 쌓는다. 유씨는 마지막 염을 하면서 인생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과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그리고 삶과 세상에 대한 회한과 인생의 진리를 증언한다. 특히 연극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아들 잃은 아비의 아픔에 내 마음도 저려왔다. 연극은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면서 그 속에서 수많은 인간의 군상과 욕심, 사회의 부조리를 잘 표현하고 있어 다양한 관점에서의 감상과 분석이 가능하다. 이에 사회적 관점, 정신분석, 그리고 기독교 사상 등 세 가지의 관점으로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1. 사회로부터 죽음의 소외
“다리 끊어져 죽지, 백화점 무너져 죽지, 배 뒤집혀 죽지, 대학 못 가 죽지, 주식 떨어져 죽지, 군인들한테 몽둥이로 맞아 죽지, 내 나리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지.”
“지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만큼 복 받는 것도 없다 이런 생각도 들어.”
유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사고, 세월호, 입시전쟁, IMF, 5.18, 미선이 효순이 사건 등 비상식적이며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인재로 인해 희생된 억울한 죽음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그리고 모순과 배리(背理)를 꼬집고 있다. 자기 명대로 살기도 어려운 현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국가의 무책임과 무력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식 장례업체인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대표 ‘장사치’ 이사의 모습을 통해 죽음마저도 돈벌이에 이용되는 현대사회의 비인간성을 풍자한다. 또한 편리를 위해 전통을 무시하고 장례의 절차를 돈을 주고 위임해 버리는 세태에 유씨는 탄식한다. “어떻게 시신을 돈으로 보냔 말이여.” 자본주의 전성시대에서 돈은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산을 두고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죽을 듯이 싸우는 형제들의 모습은 결국 돈이라는 것이 혈연의 정마저도 굴복시키는 막강한 권력임을 다시금 증명한다.
2. 인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여정
염쟁이 유씨는 전술한 바와 같이 대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다. 젊은 시절 염이 싫어 도피하려던 유씨에게 아버지는 “3년만 해봐”라는 제안을 하고, 마지못해 시작한 유씨의 염은 평생의 업이 되었다. 유씨의 이드는 아버지라는 슈퍼에고를 벗어날 수 없었다. 라캉의 명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처럼 유씨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욕망에 순응하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자신은 욕망을 포기했지만 자식에게만큼은 가업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유씨는 그 욕망을 실현한다. 가장 최악의 결과를 통해 말이다. 염쟁이 일을 물려주지 않고자 억지로 사회로 보냈던 유씨의 아들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정작 유씨의 아들은 염쟁이를 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 채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겠다던 아버지의 욕망만이 실현된다. 가업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유씨 가문을 통해 한 번 진입한 언어로 구성된 세계에서 탈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아버지라는 존재는 대를 이어가며 자식의 이드를 억압함과 동시에, 아버지 입장에서의 이드를 강요하는 실수가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죽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는 방법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고,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하나님이 떠올랐다.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매일 뉴스와 신문에서 사망사고가 언급되고, 지인의 부고와 상갓집 방문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일상적인 사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의 죽음을 대면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독교를 그저 막연한 이념으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막연한 이미지로 인식했던 사람이 자식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앙의 큰 통찰을 얻는 모습을 목격한다. 신앙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자식의 죽음은 부모에게 회복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준다. 자식의 죽음은 그 이전과 이후를 완벽하게 구분 짓는다. 부모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만 유지되고 있을 뿐 정신적인 사망을 경험한다. 안타깝게도 같은 경험이 없는 대다수의 주변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그 부모들의 투쟁이 처절하지만 반면에 꽤 많은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염쟁이 유씨의 마지막 일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그것들은 그저 유씨를 스쳐가는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식을 잃고 그 자식을 직접 염하면서 유씨는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감기몸살에 끙끙 앓는 자식의 모습에 부모는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자식의 죽음은 오죽하랴.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본다. 신이니까? 다시 살아날 것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걱정 안 되지 않겠냐고? 그럼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반문해 볼 수 있다.
“어차피 천국에서 만날 테니 먼저 죽은 자식을 보며 무덤덤할 수 있나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이 연극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다소 억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죽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그 슬픔에 대해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더 공감해 주고 슬퍼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4.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남아있는 삶을 좀 더 뜻깊고 의미 있게 살겠다는 표현이거든”
어둠 속에서 빛이 더 잘 보이고, 가장 추운 날씨에 따뜻함을 절감하듯이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사회, 국가, 가족 등에서의 관계 단절을 통해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세태를 목도할 수 있었다. “지 목숨이 지 혼자 것인 줄 아는 놈들”이라는 유씨의 말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는 서로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잘 살려고 하는 이유가 뭐겠냐, 다 잘 죽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
“좋은 삶은 좋은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거요.”
유씨에게 있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으로 인식되었던 수많은 죽음들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죽음이 되었다.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유씨는 또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잘 죽는 것’ 그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