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1:15, 마13:9, 마13:43)
김세훈 2021. 07. 13
I.서론
코로나의 대유행은 전 세계인에게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순절 시기가 얼추 비슷하다는 점과, 한국 사회 초기 집단감염의 큰 원인을 교회가 제공했다는 점은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다. 언론은 물론 국민의 댓글까지, 말할 자유만은 확실히 보장되는 대한민국에서 신앙인들이 코로나에 대해 보여 주는 입장은 너무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비 신앙인이 기독교와 교회를 바라보는 입장은 대체로 공통된 반응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은 '비판'과 '조롱'이다. 왜 이 시국에 모임을 강행해서 온 국민에게 민폐를 끼치느냐는 것이다. SNS를 통해 퍼지는 ‘종교탄압설'을 철저히 신뢰하되 정부의 방역지침에 대해서는 반대의 자세로 일관하며 공산주의에서 대한민국을 건져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입장을 가진 분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 오신 노년층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배웠을까?' 곰곰이 고민하다가 '듣는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최근 읽은 성경 말씀에 유독 '듣는다'라는 구절이 자주 눈에 띄었고, 마음에 박혔기 때문이다. 반복은 곧 강조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그 말씀들이 머릿속에 맴도는 가운데 신앙인들이 무엇을 들어야 하며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 고민은 결국 말하는 것 이전에 우선 듣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듣는 신앙'에 대한 당위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삼상 3:10)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 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미가1:2)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종교지도자의 말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라는 말씀은 곧 '인간은 실수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폭발적인 부흥, 그리고 여러 이적 등 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는 많은 대형교회가 생겨났고, 그 중심에는 소위 '스타' 목사가 있었다. 그분의 노고와 인생, 말씀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주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 성범죄, 횡령, 사기, 세습 등 상식적으로 중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목회를 잘하고 있고, 그를 옹호하는 수많은 성도가 존재하는 것은 그 목사가 신도들에게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도록 세뇌한 것이리라 유추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임에도 굳이 모이는 예배를 강행하여 코로나 확진, 전파의 오명을 기독교 전체에 씌운 그 교회의 목사들은 대부분 일정한 ‘영향력’ 을 가진 자들이다. 소위 '카리스마'를 가진 이 목사들이 “하나님이 코로나에서 지켜주신다”라는 괘변을 함에도 순진하게 믿은 신도들은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종교 중독자'가 아닐까?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성경에 잘 나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책을 줄줄 꿰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상식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라는 미가의 말씀처럼 공의는 신앙인의 최고의 덕목 중 하나이다. 모임으로 인해 전염병의 전파 가능성 증가가 확실한 상황에서의 예배 강행은 공의를 무시한 처사이다. 적어도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시킨 그것만으로도 큰 죄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유 은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 고도의 의학기술과 치료 약 등 의술을 주신 것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과학 기술과 학문이 아닌 환상적이고 영험한 것만이 신앙적이고 하나님의 은사라는 낡은 신앙을 속히 탈피하여야 한다. '힘써 하나님을 알자'라는 호세아의 말은 한국 교회에 하는 말씀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환상보다는 이성과 과학의 논리를 알아야 하며, 스타 목사의 광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부 목사님, 아니 적어도 내 경험상 많은 목사님이 '아멘' 화답을 강조한다. 자기 말에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거나, 아멘 목소리가 신앙의 척도라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인지 기도 마침의 '아멘'이외의 무수한 '아멘'이 예배 속에 등장한다. 목사님의 말씀에서 쉼표와 마침표가 붙는 부분에는 꼭 '아멘'으로 화답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으시고 신앙생활의 기간이 상당히 긴 분들이다. 목사님 기침 소리에도 '아멘' 한다는 비판적인 농담이 괜히 나오겠는가? 여기서 심각히 우려되는 것은 '무비판'적인 수용이다. '말씀의 권세', '기름 부음 받은 자' 등의 교회의 권위와 유교적 전통의 결합으로 인해 목사님의 말씀은 비판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완전무결하다는 인식이 공고하게 자리 잡힌 듯하다. 목사님의 부족함이나 무능력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맹목적 신앙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맹목적, 무비판적 수용은 생각 없이·비판 없이 듣는 것에서 기인하며, 이는 곧 맹신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듣는 것일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미가1:2)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들으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는 것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주로 말씀하시지만, 일상 속 문득 떠오르는 생각으로 말씀하시기도 한다. 꿈에서 환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으며 노을 속에서,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도 말씀하신다. 나귀의 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성경에서 발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 경로는 실로 무한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이 최우선일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 읽기를 등한시한 본인부터 반성이 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close leading 과 context적 leading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자 주의적 해석을 경고하는 성경학자들의 말과 수많은 이단의 논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144,000명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집단의 행태를 통해 전 국민이 체감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조금만 묵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고작 144,000명만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나? 예수님의 보혈 가치가 144,000명분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라는 반문이 상식적인 신자의 반응일 것이다.
이와 함께 솔로몬의 기도를 주목해 보자. '듣는 마음'을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란 실상 '듣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는 것만큼 우리 주위의 목소리와 사회 현상 또한 자세히 들어야 한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앞서 말한 context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상식적이고 과학적이며 논리적이다. 덮어두고 아멘만 외치는 그런 맹목적이고도 무식한 신앙에서 탈피해야 한다. 특별 계시만큼이나 '일반 계시'를 늘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사회와 경제와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듣는 마음'은 아이를 두고 다투는 두 어머니에 대한 재판으로 잘 알 수 있다. 현명한 판결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회학, 문화적 context를 이해한다면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아이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가 죽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의 인권을 주장하기 전에는 어린이에 대한 권리가 극히 미미했었다. 또한, 여성은 어땠는가? 당시 이스라엘에 여성의 인권이 어떠했겠는가? 세다가 그녀들은 창기, 즉 성매매를 하는 여자들이었으니 하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최하급 계층의 사람이었다. 감히 왕을 만날 수도 없는 미천한 여성을 직접 만나 그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듣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신분 고하는 물론 어떠한 처지를 막론하고 존중하고 경청하는 마음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내가 듣기 싫은 말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맘에 드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의 말만 들어서도 안 된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듣는 것이 먼저일까, 말하는 것이 먼저일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라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술한 예수님의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지지리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신 말씀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귀는 두 개인 데 비해 입은 하나이다. 입을 닫고만 있으면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귀는 일부러 막더라도 소리는 그 안으로 들려온다. 그만큼 우리의 몸은 듣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듣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귀에 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귀로 듣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내면화하여 행동으로 발현되어야 할 것이다. 사무엘의 말씀을 주목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 죽이고 진멸하라'라고 하신 말씀에 사울은 행동으로 실현했어야 했다. 양과 소의 좋은 것을 남겨서 하나님께 바치려 했다는 사울의 구차한 변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곧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을 뜻한다. 순종은 곧 제대로 듣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다. 대화는 ‘말함’과 ‘듣는 것’으로 로 나뉠 것이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대화이겠지만, 말하는 것만으로는 대화가 될 수 없다. 물론 모두가 듣고만 있으면 대화가 어렵긴 하겠지만 잘 들어주는 것은 대화의 필수 조건이며, 듣는 것이야말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매개체가 됨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상담의 기초 또한 잘 들어주는 것이지 않은가. 상담자는 잘 들음을 통해 내담자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내 말만 많이 해서는 상대방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이라면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Ⅲ. 결론
얼마 전 걱정되는 목사님이 생각나 헌금을 보냈다. 부산에서 작은 개척교회로 시작해 2000년 초 성전건축을 하였지만, IMF로 인해 모든 것이 넘어가고 아직도 상가건물에서 힘겹게 목회하시는 그분에게 헌금을 보내드렸다. 며칠 뒤 그 목사님은 나에게 전화를 하여 고맙다고 하시면서 근황을 말씀해 주셨다. '주일예배는 지속적으로 드리고 있다. 식사만 안 한다. 공무원이 감독한다고 오지만 신경 안 쓴다. 수요예배, 금요 철야까지 지속하고 있다'는 말에 아연실색했지만 어쩌겠나. 뭐라고 한 마디 한들 서로 감정만 상할 뿐, 듣지 않을 것이 뻔한데. 속에선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신앙의 절개, 지조인가? 아집인가? 모르겠다. 공의는 아닌 것 같다. 612개의 율법을 하나님은 10개로 요약하여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그것을 2개로 다시 압축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이다. 지금은 이웃 사랑에 철저히 주목해야 할 때다.
코로나로 인해 기성의 교회가 이단 사이비와 동급으로 비난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예배의 강행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신다’는 구약적 신앙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낭당에 가서 '비나이다'하는 것과 다름없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하고도 2000년 전에 휘장이 찢어진 사실은 왜 모를까.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고 있다. 교회는 머지않아 혐오 시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 전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고, 교회의 중직을 담당하시는 분들일수록 현상에 대해 성급히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뜻을 헤아렸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런 비판을 하기에는 내 눈 속 들보가 너무 큼을 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귀부터 활짝 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