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과 노화

by 샬롬




자라기를 소망해 왔다. 어른이 돼야 뭔가를 할 수 있으니. 지지배배 종알거리던 소녀는 성숙이 이루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러나 한 번 돌기 시작한 시곗바늘은 멈추질 않는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과연 어느 시점에 절정을 찍었을까? 여물기를 기다리며 부지런을 떨었건만 상승 그래프는 무한 정점을 향해 치솟는듯하다 슬며시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푸르렀던 배추 잎이 소금에 절여져 맛 들은 김치가 된들 결국은 시어 꼬부라지듯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 사그라진다. 과학의 힘을 빌려서라도 최고를 유지하려 발버둥 쳐보지만 째깍째깍, 째깍째깍... 삶은 무심한 듯 잔인하다.



한때 인생은 살수록 윤택해지는 줄 알았다. 게으름뱅이가 아닌 이상 노력하는데 어쩔 거야. 산수적 사고로 담백했던 시절, 빼기란 없었다. 하긴 그때 소녀의 세계는 우물 안 개구리였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어미 개구리의 ‘크다’는 개념과 실체 세상의 면모와는 괴리감 있듯이 처음 부딪히는 생에서 무엇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원숙한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유년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글들을 쓰는 것이다. 스스로가 처했던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거리 복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신기했다. 왜 인간은 완성을 향해 몸부림치면서도 미성숙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젊음은 그토록 영롱한가? 최초의 감성의 기억은 그토록 소중한 것인가? 우리 모두는 노래한다. 과거를, 한창 시절을. 그리고 그 한창이라 함은 결코 원숙함이 절정을 이루던 때가 아니었다. 풋풋 하나 무모하고, 설익었지만 희망으로 벅찼던. 아장아장 걸음마가 미숙함만은 아닌 것은 그 시절엔 잡물이 없어서다.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에너지고 그 자체로 찬란하다.



중년을 지나는 여성은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을 보면 아직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 예쁜 구석이 조금은 남아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리곤 핸드폰을 열어 사진첩을 들여다보다 삭제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다. 눈가의 주름, 처진 볼, 이상한 표정, 쓸 만한 사진 한 장 건지기가 어렵다. 누가 주름진 관록, 거칠어진 손마디가 아름답다 했는가? 모두 미화일 뿐, 얼굴이고 손이고 얼룩 투성이. 허둥지둥 사느라 스스로를 가꾸기는커녕 보호하기도 힘들었고 튀김 기름은 아무 때고 날아와 피부를 태웠다. 표면만 탔을까? 살아온 훈장이란 게 참, 겉으로 드러난 상흔을 살피다 쓸쓸한 미소가 번진다. 완성을 위해 달려왔는데 겁먹은 아이는 여전히 숨어있고 거친 풍화는 외모를 흩트릴 뿐 만 아니라 속사람마저 기죽인다. 이미 성숙은 시간과 비례한다는 말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포도주가 오래되었다고 다 맛 좋은 것은 아니에요!” 어느 와인 전문가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그럼에도 위안을 찾아본다. 굽이굽이 삶의 마디를 넘어왔고 조금이나마 예측 가능한 지혜를 후세와 나눔이 무의미하기만 하겠냐고? 이젠 예스맨이 된 듯싶다. 흑백이 분명했고 가리는 게 많았는데 다 부질없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인생살이는 그저 거대한 물고기를 잡아보려는 제스처! 실체가 없을지라도 시도조차 안 할 순 없지. 원 없이 살렴, 다 해보렴. 자신에게 내재됐던 소심함을 도리질하며 주변인을 호쾌히 부추긴다. 원숙이란 나의 아름다움을 보강하는 게 아니었다. 남의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일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겪지 않을 일들을 겪은 후의 깨침을 진실 되게 말해주는 것이다. 끝을 알면 두렵지. 그대로 직진! 삶은 현재다. 조금이나마 완숙해져서 얻은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전 15화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