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메의 성지, 일본을 향한 애증 -1부-
'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로 시작하는 일본의 이모저모
#FT아일랜드를 아시나요
‘FT아일랜드’라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룹사운드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활동하고 있겠지만, 예전만큼 자주 안 보이지는 않는 그룹사운드. ‘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곡 ‘사랑앓이’) 등 뭔가 허세와 오글이 가득 찼지만, 뭔가 듣기는 좋았던 명곡을 여럿 남겼는데, 개인적으론 일본 비주얼 락을 연상케 하는 그 느낌이 좋아, 참 많이 들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해서인지, FT아일랜드는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 애니메이션 ‘토리코’의 OST를 불렀다. 이 ‘토리코’는 한때 ‘원피스’, ‘나루토’와 자웅을 겨룰 정도의 기염을 토한 인기만화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그래도 어찌됐건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OST에 심심찮게 한국 가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문화적 정수다. 2020년 도쿄올림픽 홍보를 위해,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故 아베 총리는 슈퍼 마리오로 분했을 정도로 그 소프트파워는 가히 글로벌 천상계 급이라 할 만했다. 물론 입기 싫었는지 대충 걸친 듯한 천 쪼가리가 등장하자마자 바로 벗겨져 버린 거나, 코로나로 도쿄올림픽이 폭망 했다는 거는 차마 안 비밀.
지금이야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국책사업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사실 아니메 산업이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떡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갑자기 폭발했는데, 그 폭발의 기폭제는 바로 어느 미국인이 쓴 논문 한편이었다.
# 일본 아니메를 떡상시킨 미국 형의 사탕발림
2002년 더글러스 맥그레이는 ‘일본의 국민문화총생산’이라는 논문을 하나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문화강국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극찬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미국 하면 냅다 좋아라 하는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아, 그 순간 일본 아니메는 비트코인의 양 싸다구를 후릴 정도로 떡상을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 또한 예전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타쿠를 사회부적응자, 잠재적 범죄자 등으로 치부해 왔다. 1989년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어쩌다 보니 오타쿠였고, 울고 싶었는데 정확히 싸대기를 갈겨준 게 원체 고마웠는지 일본은 오타쿠를 개쓰레기의 아이콘으로 제대로 찍어 내렸다.
유명한 아니메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End of Evangelion’의 난해한 전개과 결말을 두고, 이러한 당시 시대상을 고려한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TV판 결말에 불만을 품은 오타쿠들의 테러짓에 빡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그래, 니들이 원하는 대로 극장판 냈다. 다 때려죽였어^^”라고, ‘골방에 처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운동 좀 해라. 공도 좀 차고’라는 충고를 거친 상남자스럽게 때려 박아줬다는 것.
아무튼 미국 형님의 사탕발림으로 빚어진 ‘쿨 재팬’이라는 슬로건이 이러한 오타쿠들을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순식간에 환골탈태시켰는데, 연예인 등의 서브컬처 취미가 알려지자 점차 혐오가 가라앉은 한국이나, 미국이 섞이자 떡상하는 일본을 보노라면 혐오를 벗기는 가장 쉬운 길은 결국 권력에 기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메와 게임 등 여러 서브컬처로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를 꾸며준 고마운 일본이지만, 어른들의 세계로 오면 '꺼진 불도 다시 안 보면 다시 탄다'라는 걸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 심심하면 일을 낸다. ▲2019년 일제 강제징용 판결 등에 대한 보복으로 해석되는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 ▲2023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2024년 최근 네이버의 해외진출 성공사례로 꼽히는 메신저 ‘라인’에 대한 일본의 강탈시도가 그 예다.
마냥 멀리하기엔 ‘오모테나시(최고의 환대)!’를 마빡에 붙이고 있고, 친하게 지내려고 하면, 이따금씩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부르짖는 이 경계선적 성격장애 같은 이웃을 두고 애매한 걸 딱 정해주는 ‘애정남’이 될 순 없겠지만, 한 번은 이것들이 진짜 어떤 성격인지 정도는 알아보는 것도 나름 유익할 것이다. 그래야 선도 깔끔하게 긋지.
일본의 지리적 특성 등이 빚은 특유의 성격을 시작으로 3가지 꼭지를 준비해 봤으니, 하나씩 차근차근 달려보자.
#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
에도 막부의 사무라이들의 유혈극을 다룬 일본 만화 ‘시구루이’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랫것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 윗 것들은 그냥 들고 있던 칼로 목을 썰어버리면 그만이었기에, 윗 것들의 가학성과 아랫것들의 피학성이 극단적으로 발달하기 좋았다.
수틀리면 썰어버리는 특유의 사무라이 문화는 필경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모습)라는 이중성을 낳기도 했지만,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여사가 ‘국화와 칼’이라고 세련되게 규정한 이중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자연과 삶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는 고도의 감수성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칼로 사람을 엽기적으로 난자하는 극도의 야만성도 가졌다.
이러한 생리에는 일본 특유의 경직된 자연관과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역지사지 일본’(김훈 저)에 따르면,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한-일 간 차이가 나타나는데, 한국은 오누이가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이 된 반면, 일본은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지 못하고 별이 되었다. 일본에서 하늘은 절대자의 영역이었고, 아랫것들은 해와 달로 상징되는 신이 될 수 없었다.
그 일본의 자연환경 자체도 딱히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진 않았다. 툭하면 벼락이 치고, 여차하면 지진과 화산에, 더럽게 재수 없으면 쓰나미까지 얻어맞는 게 유고한 전통이었던 일본이었기에, 자연은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납작 엎드려 지나가기만을 바래야 하는 것이지, 결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관이 이럴진대, 윗 것에게 감히 개길 수 있었을까. PTSD가 워낙에 쎄게 왔어야지.
섬나라 특유의 여건도 있을 것이다. 사방팔방이 바다로 막혔는데, 괜히 개겼다가 뛰어봤자 벼룩인 꼴을 못 면할 텐데, 그럴 바엔 자연이, 윗 것이 얼마나 어떻게 지랄발광을 하건 그냥 아닥하고 엎드려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내 옆이 애먼 짓을 하면 나도 같이 얻어터질 테니 옆에도 같이 감시하면서.
이러한 특유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을까. 일본엔 우리와 말은 비슷한데 실상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다른 경우들 있다. 예를 들면, ‘낙하산 인사’. ‘역지사지 일본’의 저자 김훈에 따르면, 우리에게 ‘낙하산’은 정당한 절차 없이 윗분 빽으로 들어온 꼴불견인데, 일본에선 애초에 윗분이 절대적이라 그런지, ‘낙하산 인사’를 꼴불견이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된다, ‘전관예우’라는 쪽에 더 가까운 듯.
또 다른 예로는 ‘의민’이 있다. ‘의로운 백성’이라는 뜻인데 우리로선 자신을 희생해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에선 ‘희생양’이라는 뜻에 가깝다. 막부 시절, 지역 다이묘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민초들이 중앙 쇼군에 민원을 제기할 경우 쇼군이 해결해주기도 했지만, 감히 개겼다는 이유로 민원 제기자는 반드시 죽였다. 그래서 민초들은 이 민원을 넣어주고 죽어질 사람을 뽑아야 했는데, 그게 ‘의민’이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