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개봉작 - 우연히 봄

<프로젝트 헤일메리>, <호퍼스>, <아르코>

by 샤니


1. <프로젝트 헤일메리>


오랜만에 본 우주 SF 소재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3/18에 개봉했다. 우연찮게 시간대가 잘 맞아 보게 되었는데, 그만 E.T.가 사뭇 그리워졌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다른 외계 유기체는 다른 원소로 구성된 집을 지닌다. 인간과 공유할 수 없는 공기로 호흡하고, 알 수 없는, 정확히는 볼 수는 없지만 오히려 몰라서 신비롭게 다가오는 능력치를 지녔다. 그렇다고 그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커다랗게 다가오는 존재다. 영화는 왜 주인공은 먼 우주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풀 수 없는 질문으로, 실험실을 떠나게 된 연유로 영화는 시작하고 또 돌아온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의문은 왜 공중에서 맴돌고 있는 상태의 버려진 우주선에, 언제 폭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우주선에 외계인이 찾아왔느냐는 거다.

그렇게 찾아온 외계인 로키는 알지도 못하는 종 인간의 우주선에 자신이 만들어 둔 방어막 화면상으로는 유리막처럼 보이는 것에만 의지해 보조장치 없이 낯선 우주선에 눌러앉아 버린다. 물론 둘은 자신의 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물체에 대해 알아야 하고 태양의 에너지를 잡아먹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포착해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는 각자의 안정을 책임질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보장된 과학적인 증거, 숫자가 없을 뿐이다. 아마도 자연과 같은, 사실상 자연스러운 타인의 존재에 다름없는 전제이다. 실험실에서 하나의 목표, 인류를 위해 당신은 이런 능력치를 가졌으니,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기준으로 정당화하는, 답이 정해져 있는 상호성과는 다른 전제다. 둘은 오직 우주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당연한 위험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지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둘의 통로가 열리는 순간이 참 흥미로웠다. 이상하게도 어떤 '좋다'라는 표현도 충분하지 않은 느낌. 나 자신조차 콕 집어 납득할 만한 좋다의 증거가 있지 않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원소부터 다르게 이루어진 두 우주선의 연결로가 열릴 때는 이것은 <에이리언>과 같은 공포영화인가 의심할 뻔했다. 산소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할 때조차 소통의 오류로 화를 내게 되는 하찮은 외계인 손가락의 두드림도, 저러다 유리 벽이 깨지면 어쩌지라고 의심하게 되는 보는 처지의 상황에서도 관객으로서는 의심 많은 유죄 인간이 돼버린 것 같았다. 다른 호흡 방식을 가진 두 존재가 그곳에서 공존하며, 가장 위험한 곳이 곧 가장 안전한 안식처로 작동한다. 그 동굴과 같은 통로는 영화가 선물하는 관계 속의 해피엔딩이다. 보기의 입장에 머무르는 나는 스크린 안 우주 속으로 완전히 다가가지 못하고 안전한 상태로 머물게 되는 의심 많은 사람으로서의 자아로 그 동굴 공간에 함께 머무르게 된다. 이 의심스러운 공존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래서 로키가 '좋다, 좋다, 좋다'라고 했을 때 정말 좋았다. 그럼에도 이상했다. 분명 한 번도 <E.T.>를 보고 의심하지 않았는데,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2. <호퍼스>


영화를 기대감 없이, 설렘 없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왔는데, 영화 <호퍼스>가 왓챠피디아에서 평점이 꽤 괜찮아 조금은 기대감이 생겼던 상태였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인간 캐릭터의 매력은 잘 모르겠지만, 동물 친구들이 가지는 느긋함, 필터링 없는 감정 표현, 그리고 순수한 집념은 모두 합격이다.

영화 <호퍼스> 스틸컷

삶이 곧 노동이며 여가라는 것을 이 동물 친구들이 표현한다. 비버들은 노동요를 들으며 춤추며 자신들만의 댐과 서식지를 구성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움직임과 접촉하는 것은 번역 없는 교감에 가깝다. 할머니는 자연 안의 경험에서는 모두가 일부라고 이야기하셨다. 그것은 정체를 모르는 것에 대한 어떤 전체적인 믿음을 전제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풍경 안에서 겸손히 느껴 보는 일이다. 동물의회에서조차 인간 또한 자연에 포함된 미지의 존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포유류의 왕은 위장한 뉴비 비버 메이빈에게 연못법에 대해 친절히 알려 주었다. 기본 첫 번째 원칙은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름을 불러주면 좋다. 또 마지막으로 필요할 때는 서로를 먹고 잡아먹히는데,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렇다. 아주 실질적이면서도 순응적이기도 한 규칙이다. 그런 숲속의 포유류 동물의 왕이 메이빈을 오른발로 찍었다. 오른발이 찍히는 순간, 그는 솔직하고 용감한 당신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맹세와 다름없다. 존중에 대한 약속이 인간과 닿을 때는 이미 예정된 무자비한 욕망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인간과의 통합이라는 상상력 안에서 제한받아 생긴 충돌이다. 고속도로에 나타난 상어라니. 동물의회의 반격은 잔인하다 못해 깜찍한 충돌로 비친다. 존중의 가능성으로 통하지 않는 언어가 줄 수 있는 현대의 낭만은 아이폰에 입력하는 서툰 이모티콘의 다발이다. 오른발 하나로 표하는 하이파이브의 푹신한 형태, 무한히 누를 수 있는 폭신함의 형태가 메이빈과 비버왕 서로의 마음을 평안케 할지도 모르겠다. ‘하트, 하트, 하트’, ‘통나무, 통나무, 통나무’, ‘감자, 감자, 감자’ 혹시 인간들은 비버에게서도 좋아요를 기대하는 것인지 조금은 걱정스러워졌다.



3. <아르코>


<아르코>의 휘황찬란한 포스터를 보고 조금은 충격을 받았는데 기분은 좋았다. 아마도 국내 개봉 포스터는 조금 더 근엄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인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저 이마에 빛이 레이저처럼 나오고 있는 나무위키에 올려진 포스터(직접 확인해 보시기를)를 가지고 싶다. 별 이유는 없는데 뭔가 화장실 앞에 붙여 놓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보았다.

영화 <아르코> 스틸컷

이 영화의 많은 후기에서 내용과 그림체가 낭만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브리 작품과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말이다. 홍보란에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남자아이 아르코가 동일한 뭔가 신비로운 능력과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다른 세계의 삶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여자아이 아이리스는 변화를 원했고, 비행을 즐기다가 떨어진 아르코를 발견했다. 아르코는 미래에서 도착한 무지개색 순수한 마음, 탐험가의 마음을 지녔다. 전쟁을 겪고 돌아오는 하울과는 다르게, 아르코의 비행은 감시 체계와 약탈자가 즐비한 세계가 있지만 소녀 혹은 가족의 지킴 아래 온전히 안정된 곳에서의 비행인 것으로 보인다. 불바다가 된 도시를 피해 다시 자신의 세계로 비상하여 오르려고 했던 아르코는 소녀 또한 업어서 날아오르려고 애를 쓴다. 날아오르지 못하는 현실을 오직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사실 영화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의 탈출 자체보다 잠시 서로가 무지개를 보고 기뻐하는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그것을 지켜보던 로봇들 또한 관계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린다. 아르코의 모험 기간에 나이가 들어버린 부모님은 생을 지나가며 로봇이 남긴 기록을 추적하며 그들을 찾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코를 찾아온 가족들의 품에서 서로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리스는 명확히 인지한다. 아이리스가 떠나는 아르코에게 '걱정 마'라고 이야기하는 연유는 그녀가 이미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미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번개처럼 나타난 아르코를 앞에 둔 순간의 소중함은 디스토피아적인 환경에서 잠깐 꿈처럼 다가온 어린아이들의 여행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는 아르코의 내적 변화보다는 그를 보는 존재들에 대한 시선에 머무른다. 아르코보다는 아이리스의 시선이 훨씬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끝 또한 아이리스의 시선에서 멀어져가는 아르코틀 보는 것으로 잠깐의 무지개와 같은 인간, 그런 순간 행복을 주는 아이에 대해 아이리스의 시선으로 그려본 이쁜 하늘에 머무른다. 아르코에게는 미안하지만, 잘생긴 하울이 조금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