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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뀰사마 May 24. 2020

내 이름을 불러다오

하지만 망치면 뒤진다. 지옥 끝 까지 따라가 팬다.

*이 글은 2019년 2월에 미디움에서 작성한 글을 옮겨왔습니다.  


대부분의 이민자 출신들은 자신들의 본 이름 대신 영미권 크리스천 이름을(* 비영어권 출신들이 선택한 가명들은 밥티즘네이밍에서 유래한 것이나 편의를 위해 이후 영어 예명이라 칭하겠음.) 가명으로 쓴다. 이유야 각자 개인 나름대로 다르겠지만 뭐 가장 공통적인 이유는 하나이다. 내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이름이 타인에 의해 x같이 불리는 게 싫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한동안 그 예명으로 호주 정착 2년까지 살아왔다. 나는 더 이상 그 이름을 쓰지 않고 내 본 이름으로 불리기를 현재 고집하고 있다. 내 본 이름이 그렇게 어렵다면(사실 내 이름 정말 스펠링이 쉬운 이름이라 이런 변명 정말 멍청하다 생각하지만) 하다못해 성이나 성을 응용한 닉네임으로 불리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 포스팅을 이어나가기 앞서 이 글은 영어 예명을 사용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힌다. 그러고 자시고 말고 나부터가 써왔는 걸요. 내 개인적 다이얼로그에 불과할 뿐임을 강조 또 강조함. 그리고 서역권에서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 필수요소임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걸 간과하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나는 유학생 시절에는 영어 예명을 쓴 적이 없다. 굳이 어려운 이름도 아니고 미국인들이 딱히 내 이름을 발음하는데 크게 어려워하지도 않았고. 막 한국식으로 정확한 발음이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런 걸 기대하기엔 오버이고. 연음에서 slur가 들어가긴 하지만 불릴 때 나를 지칭하는 건 명확히 알 정도였다. 유학생들끼리 서로 미국인이 자기 이름 틀리게 발음한다고 불쾌하다며 토로할 때도 나는 ‘내 이름은 딱히 그렇게 이상하게 안 부르던데. 역시 이름이 쉬워서(받힘과 어려운 모음이 없는 이름이다.)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내 이름이 좋기도 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별 이유도 없이 갖다 붙이는 건 내 아이디를 숨기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이름이 비교적 정확히 불리었던 건 대학이라는 아카데믹을 기반으로 한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처음 호주에서 구직할 때 나는 내 본명으로 CV를 돌렸다. 한 달 내내 그 어떤 곳에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고 나는 내가 그렇게나 인력으로서 쓸모가 없는 인간인가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보고 있던 R이 조언을 했다. 가명을 쓰라고. 이름만 봐서는 내가 외국인인걸 모르게. 아니 전화 인터뷰 가자마자 내 악센트 때문에 외국인인 줄 알건대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야부리여? 뭣보다 학위가 호주 학위가 아닌데?


R은 닥치고 가명을 이력서 이름란에 땅땅 박으라고 했다. R과 나는 호스텔에서 Baby Name 사이트에 들어가 랜덤으로 이름 몇 개 골라 가장 부르기 쉽고 나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추려냈고 미니 마니 미니모로 영어 이름을 골랐다(…) 당시 우리와 같은 방을 쓰던 대만계 키위 E 역시 구직을 못해서 이미 worn out 한 표정으로 우리를 한심하게 보며 R에게 헛바람 좀 그만 넣으라고 말했다. 반신반의로 그렇게 이력서를 고쳐서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100장을 보내도 답장 1통 없던 게 무색할 정도로 답장 횟수는 높아졌다. 그래 봤자 50장 보내면 10통 정도였지만 1 통도 못 받은 것에 비하면 놀라운 상승률 아닌가.


아무 연락도 못 받던 나의 이력서는 하루 이틀 캐주얼 잡이라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하루 이틀 꼿꼿이 쌓인 호주에서의 경력은 호주 문화가 생소하지 않은 이로 포장해주었다. 하루 이틀 일하는 캐시 잡에서 페이 슬립을 받는 컨트랙터로 그렇게 조금씩 상황은 나아졌다. 특히 호주 공항에 발자국 찍은 후 2달이 지나서야 처음 교육재단에 컨트랙터 개발자로 들어갔을 때 나에게 조언을 해준 R은 자기 일만큼이나 기뻐해 주었다.


뉴타운에서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커피를 마셨는데 R은 C은행에 프로덕트 세일즈팀에 들어가서 높은 커미션을 받는 계약직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잠깐. How? 너 셰프였잖아. 시드니로 돌아오기 전에 아웃백 호스텔에서 캐주얼로 일하던 백패커. R은 새로운 걸 도전해보고 싶어서 정장을 사곤 자기 출신 악센트(런던 에섹스 출신)를 좀 더 강조하며 인터뷰에서 액팅을 했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R은 합격통보를 받았고 바로 C은행 시스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C은행은 고등학교 졸업증, 셰프 자격증만 덜렁 가진 R에게 은행 상품 세일즈를 위해 필요한 비즈니스 자격증과 교육과정도 서포트해줬다. Wow.


사실 R은 엄청 외향적이고 자연스럽게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타입이라 그의 커리어 변경은 다소 드라마틱해도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잘 할거 같고. 다만 그가 자신이 그 계약을 어떻게 땄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서포트를 받고 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동안 아직도 무직 상태이던 E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비교를 했다.


영어가 제1모국어(굳이 따지자면 Third Language나 되려나)도 아니고 비자 제약이 있는 외국인인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E는 키위라서 워킹 퍼밋 제한도 없고 학교도 뉴질랜드에서 다녀서 호주 시스템에 적응도 잘할 텐데? 따지고 보면 3개월 후에 비자가 완료돼서 곧 영국으로 튈 예정인 R이 더 불안정한 고용자 아닌가? R(백인/영국 런던 출신/고졸/관련 직종 경험 없음)과 E(대만계/키위/경영학 사보 유+ Graduate Dip 있음/영국에서 C브랜드 패션회사에서 인턴함)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E가 싹퉁바가지가 좀 없는 타입이라 나랑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 갈라지다니. R이 잘돼서 축하해주면서도 한편으론 뒷맛이 좀 씁쓸하더라. 이유가 무엇일까. 성별? 인종? 아니면 영국계 커먼웰스 성씨와 대만 계임을 나타내는 성씨의 차이? 아니면 단순히 운이었던가. 어찌 E는 CV 스크리닝조차 통과를 못한 걸까. 내가 HR 담당자가 아니니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후 E는 한 달 후에 뉴질랜드를 떠돌다가 부모님이 계신 대만으로 돌아갔다고 R이 전해줬다.


이후 나는 영미권 성명학(?)의 무서움을 손수 체험하고 계속 영어 가명으로 일자리를 전전했다. 자기소개할 때도 각각 다른 프로젝트 계약 시 입사할 때도 내 가명이 쓰였다. 물론 정식적인 페이퍼 워크에는 본명을 요청했지만. 그런데 이미 나를 가명으로 알기 시작한 사람들은 각종 오피셜 페이퍼에도 내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기재했다. 영어 가명을 쓰는 게 뭐 드문 일도 아니어서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건 나를 채용한 리쿠르터 및 인사과도 그러했다.


문제는.. 2년 후에 와장창 터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으레 평범하게 잘 진행될 일도 대수롭지 않은 걸림턱에 걸려 꼬이는 때가 있지 않은가? 난 그게 꼭 문서에서 터지는 타입인데 ATO와 영주권 프로세싱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영어로 대화한 다이얼로그는 긴박감 넘치는 현황을 전하기 위해 그냥 한국어로 적는다.


ATO> 저기 세금 환급한 거 일부 다시 페이먼트 해주셔야겠는데요? 저희가 환급을 잘못했어요.

나>읭? 그게 뭔 소린데요?

ATO> 본인 이름 말고 타인 이름으로 세금 인풋이 들어왔는데 전산상 오류가 있었나 보네요. 환급이 배정될 금액보다 더 높게 나왔어요.

나> 아니 뭔 이름으로 들어왔길래요? 좀 더 말해주죠.

ATO>[영어 이름]으로 이만 불 이상 입력이 되어 있어요. 저희가 이거 본디 주인에게 환급금을 다시 정산해서 줘야 하니까 새로 택 스롯징에 페이먼트 탭이 뜨면 그 절차대로 처리하시면 되세요.

나> 그거 전데요…

ATO> 환급 주 이름이 다른데 거짓말하지 마시죠. 세금 거짓으로 롯 징하면 페널티 받는 거 아시죠?

나> 혼또니 본인 데스…

ATO> 증빙 가능한가요?

나> 아니 증빙이고 자시고 간에 동일 TFN으로 입력이 되어 있을 건데 뭐가 문제냐고요…TFN을 키로 전산화되어 있을 거 아니요..


이후 ATO 오피서와 왈가왈부 한동안 입씨름을 했고 나는 [영어 이름]과 납세자인 내가 동일인물임을 증명해야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회계 쪽 사람들은 거짓말인 줄 안다. 나 같아도 거짓말이라 여길 거 같다. 아니 TFN으로 어차피 본인 증명이 될 텐데 이게 뭔 개소리인지. 그리고 나 말고도 본인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서류 처리한 사람 한둘도 아닐 텐데. 이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임에도 재수 없게 걸린 게 하필 나였고… 이후 무조건 공식 오피셜 서류에는 본명 기재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일하는 프리랜서 컨트랙터다 보니까 그냥 여전히 계약서 및 페이롤에 가명으로 기재하는 회사가 많았다. 게으른 것들.


이런 문제는 영주권 프로세싱에서도 터졌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영주권을 롯 징하고 브릿징 비자로 세월아 네월아 살다가 immi 웹사이트에서 노티스가 날아왔다. 폴리스 클리어런스 체크가 기간 완료되었으니 다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옘병할 것들. 니들이 닝 기적 거리느라 기간이 완료된 건데 왜 내가 뒤처리를.. 칙쇼.. 하지만 이민성이 갑이고 신청자가 을인 이민 프로세싱에 궁시렁 해봤자 나만 손해. 결국 3개국(호주/미국/한국)의 폴리스 체크를 다시 발급받아서 냈다. 어휴 롯징기간도 짧게 주는 주제에 되게 깐깐하게 굴어. 그렇게 가까스로 롯징 후 반년이 지나서야(..) 다시 연락이 왔다. 폴리스 체크 다시 내라고. 난다고레?!


Immi> 폴리스 체크 이거 본인 본명으로만 발급받아왔네요. 영어 가명으로도 발급받아서 제출하세요.

나> … 불가능한데요

Immi> 그건 니 사정이고 우리는 매뉴얼대로 모든 클리어런스를 체크해야 하니까 본명/영어 가명 둘 다 발급받아오세요.

나> …


아주 야마가 돌아버릴 거 같다. 여기서 폴리스 체크를 잠시 설명하겠다. 호주의 AFP체크는 본인 명의와 명의로 입증하는 크레디트를 조합한 네임체크로 범죄조회 경력서를 출력한다. 그래서 아예 신청서 폼에서도 성씨 변경이든 개명 전 후든 이름 수 관계없이 다수의 명의를 신청서 폼에 넣어서 조회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명의와 주민번호로 조회한다. 한국에서 가명은 호주에서처럼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헬조선판 주민등록 1984…) 주민등록상 기재되어 있는 명의만 출력이 가능하다. 어차피 주민번호로 쫙 조회가 되는데 뭐. 고로 본인의 본명과 혹은 개명 전 이름만 폴리스 체크에 출력할 수 있다. 


미국 FBI 체크는 지문 출력과 SSN 그리고 이름을 매칭 하여 조회한다. 바이오 채취 조회. 그러니까 미국과 한국의 폴리스 체크는 호주처럼 네임체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명의 크레디트 조회를 하는 방식이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걸.. 경력이 많은 이민성 오피서라면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아무래도 나는 오피서가 잘못 걸린 것…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나 없다니. 나 삼재 끝났다며 엄마… 결국 나는 한국과 미국은 오피서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폴리스 체크를 제출할 수 없음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호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어 가명을 썼는데 이후 존재 증명을 다시 하노라니 현타가 아주 씨게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래도 뭐 일사 단락 어찌어찌 잘 처리됐으니 오늘도 지옥의 더위를 시드니에서 맛보며 피부가 노릇노릇 잘 구워지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사람이 살다 보면 어쩌다 그렇게 뭐 꼬일 수도 있는 거지.


진정한 현타는 이 고비를 지나 파트너 J의(지금은 EX인) 조카들이 크면서 맞게 된다. 첫째 조카 엠비글이 2살이 지나면서 슬슬 영어를 구구가가 입 트기 시작했다. J의 가족들은 내 이름이 두 돌배기에겐 어려울 거라며 구설음 같은 닉네임을 만들었다. 처음에 엠비글은 그게 진짜 내 이름인 줄 알고 가족 내에서만 불리는 별명으로 날 불렀다. 그러다 몇 개월 후 머리가 좀 더 크니까 자기 할머니인 내니가 가족 닉네임으로 날 부를 때 똑 부라지 게 한 마디 했다.


‘[본명] 이름 그거 아니잖아. 왜 [닉네임]으로 불러? 왜 나만 그렇게 불러야 해?’


가족들은 엠비글의 명민함에 깜짝 놀랐다. 마냥 애기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이 부르는 내 이름과 자기가 불러야 하는 이름이 다른걸 금방 캐치를 한 것이다. 그렇게 내 패밀리 닉네임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엠비글은 내 이름을 집안 내 어느 어른보다도 또박또박 불렀고 문득 그간 내 이름을 금방 캐치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던 호주인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갔다. 두 돌배기보다 못한 멍청한 Asshole들… 엠비글은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삼촌인 J의 이름보다 내 본명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익혔다. 엠비글은 가끔은 얄밉지만 정말 영민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이다.


엠비글에 이어 둘째 조카 척척이도 슬슬 옹알이를 시작했다. 위로 맏이인 엠비글이랑 어울리다 보니 척척이의 옹알이 트임은 엠비글보다 빨랐다. 식구들은 다시 나를 그 망할 패밀리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척척이는 크리에이티브한 엠비글보다는 좀 스포티하고 벌크한 타입이니까 얘에게 내 본명은 어렵지 않을까 식구들은 지레짐작했다. 야 근데 내 닉네임이면 내 동의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망할 인간들아라고 잠시 속으로 외쳤지만.. 뭐 언제는 나에게 언사권이 있었냐 이 집안에서..(씁쓸)


허나 어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척척이는 바로 내 본명을 정확히 불렀다. 엠비글이 부르는 내 이름도 사랑스러웠지만 둘째 척척이는 좀 더 발음이 tweak이 들어가서 그런지 더 내 본명의 발음에 정확했다. 나는 식구들에게 대놓고 ‘야 우리 식구들 중에 가장 어린 척척이가 가장 정확하게 내 이름 부른다’라고 수동태적 면박을 줬다. 솔직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니냐. 타인의 멀쩡한 이름을 자기들 멋대로 어렵다고 미리 선 그어놓은 걸 아무 필터가 없는 애기들은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쯤 되니 내 이름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도 익숙해지는데 장벽이 높은 이름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이젠 내 이름 가지고 컴플레인 거는 인간들을 보면 ‘두 살보다 못한 지능’을 가진 걸로 보이기 시작했다. ‘혜’ 자나 ‘의’ 모음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영어에 존재하는 자음과 ‘아에이오우’의 기본형에서 안 벗어나는 이름인데 그걸 발음 못한다고 징징대는 게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거다.


나는 슬슬 영어 가명을 버리고 내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살아간 지 몇 년이 지나다 보니 이제 슬슬 내 이력서는 어느덧 갓 이주해 온 뜨내기 시절에 비해 많이 달라졌고 뉴커머의 굴레에서도 슬슬 벗어나니까 굳이 영어 가명에 집착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나를 영어 가명으로 알던 사람은 내 본명과 나를 매칭을 못한다. 비즈니스 프렌드들은 왜 이쁜 영어 가명 두고 이상하고 특이한 이름로 바꿨냐고까지 했다. 무례한 것들-_- (하여간 이래서 서구권 백인들은 안돼)


어느 직장은 입사할 때 인사부에서 내 성씨가 이름이고 내 이름이 성인 줄 알고 이름 순번을 뒤집어서 인력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놨다. 나중에 IT부서에 코렉션요청을 했는데 이미 내 모든 서버 및 어카운트 크레덴셜이 그 염병할 순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냥.. 그대로 그 직장에 재직하던 기간 내내 냅뒀다. 리쿠르터들에게 오는 회신도 현저히 줄었다. 영어 이름이 적혀있던 CV를 받을 땐 아주 친근하게 답장이 바로바로 왔는데 본명을 쓰기 시작하니 회신이 오는 빈도도 줄었다. 물론 처음 정착 초기 당시와는 달리 막 100통을 보내도 한통도 회신이 없는 그런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딱히 본명을 쓴다고 베네핏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영어 이름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뭐 굳이 말하자면 커먼웰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편의보다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의 반골 정신에 가깝다. 톨스토이와 챠이코프스키, 구겐하음도 정확히 발음하는 데 왜 내 훨씬 직관적이고 쉬운 내 본명을 발음 못하는가? Bullshit이지. 그뿐이냐고. 아이리쉬, 웰쉬나 서유럽& 동유럽 오리진 이름도 정확히 발음한다. 


물론 영미권 크리스천 네임이 아니니 실수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런 경우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냐고 상대에게 물어보고 연습을 한다. 대뜸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니 이름 특이하고 불편하다고 본인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이름을 면전에서 컴플레인하진 않는단 말이다. 시얼샤, 이모젠, 애쉬을린, 갤라드리엘도 정확히 발음하면서 동유럽의 흔해빠진 이름과 스펠링도 정확히 일치하는 내 본명을 발음 못하는 게 말이 되냐고. 아 적고 나니 또 급 화나네.


메이즈 러너의 민호로 연기했던 미국인 배우 이기홍이 그러지 않았나. 상대방이 내 이름을 좆같이 부르면 제대로 부를 때까지 교육시키라고(<정확히 이 워딩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걸로 하자. 검색해서 출처 찾기가 너무 귀찮다 지금..) 나도 그 말을 되새기며 제대로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뚜까 팰 작정이다. Call me by my name without fucking it up. 언젠가 또 지쳐서 영어 이름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땐 그때고 일단은 될 때까지 내 본명을 관철할 생각이다. 그 와중에도 게으른 인간들은 바로 내 성을 이름으로 픽하는 게 대다수이지만 뭐 적어도 그것도 내 본명 중 일부니까 그건 그냥 자비롭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을 거지같이 발음하면 다음번엔 척척이가 내 이름 부를 때 잽싸게 녹화해서 넌 두 돌배기보다 못한 저능아라고 굴욕감을 던져줄 것이다.


—Fin —


PS 1. 그나저나 내 영어 이름 한국계 여성분들이 픽한 가명 중에 엄청 흔한 이름인걸.. 호주 살면서 알게 되었다... 성씨도 정말 흔한 한국 성씨인데 가뜩이나 다양성 좆까라인 보편적 크리스챤 이름에서 한국계 손들어보세요~하면 동명이인이 우르르 손을 드는 상황까지.. 급 영어 이름 바꾸자니 딱히 크게 맘에 쏙 드는 것도 없고 쉽게 불리면서도 독특한 이름 정말 찾기 힘들더라고요. 사실 이거 때문에 본명을 쓰게 된 이유도 있음.


PS 2. 본명으로 밋업 갔는데 한 친구가 내 본명을 듣더니 엄청 좋아하더라고. 자기 아들이랑 이름 비슷하다고. 자기 아들내미 이름이 모 스케이팅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그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가끔 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아들내미 부를 때 나 부른 줄 알고 대답할 때가 많다. 참고로 쌍둥이 엄마인 이 친구 딸내미의 이름은 유리가면의 주인공이다. 이 친구는 영국/호주 여권이 있는 오지지만 자기 이름도 비영어권 문화의 이름이다. 이 친구랑 이름 이야기가 나올 때면 '야 솔직히 인간들 너랑 내 아들 이름이 George가 아닌 이상 평생 못 알아 처먹을 거다'라는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뭐 그건 그네들 사정이지. 


PS 3. 웃긴 건 플사 달고 영어 이름을 쓰던 링크드인에선 디엠으로 추잡한 플러팅들이 정말 많이 들어왔다-_- 어휴 진짜 다 나가 죽어라 냄저 새끼들. 본명으로 돌아가기로 다짐하고 플사도 실사진이 아닌 고양이 일러로 바꿔버리니 메시지에서 Sir를 붙이거나 생물학적 성별이 구분이 안 가니 좀 더 정중하게 연락이 온다. 본명을 택함으로써 잃은 베네핏도 있지만 이런 리트머스 작용도 있으니 참.. 기분이 싱숭생숭


PS 4. 사실 맘에 드는 영어 이름 있으면 영어 이름 쓰는 게 인생이 편하긴 하다. 나는 내면의 똘기를 참지 못하고 옹고집으로 본명을 고집하고 있긴 하지만. 딱히 내 거다라고 삘이 오는 이름이 없더라고. 삘이 오는 영어 이름 골랐는데 그것도 안 흔한 이름이면 인간들 잘 못 알아듣더라고.. 쉬운 이름을 고르노라면 진짜 너무 흔한 이름밖에 없는데 내 성씨도 너무 흔한 한국인 성이라.. 동명이인 서류 꼬임의 헬게이트로 바로 진입. 2년 전의 악몽 리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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