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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백수 Apr 30. 2022

리움 멤버십 회원 프로그램 <다르게 보기> 후기


최근 리움미술관(이하 '리움')의 멤버십 회원 프로그램인 <다르게 보기(Ways of Seeing)>에 참가했다. 리움 멤버십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 리움 관람에 있어 예약을 하지 않아서 되어서..가 가장 컸고(이렇게 예약이 풀려버릴 줄이야), 1인 기준으로 연 10만원이라 기획전시를 10번 이상 보면 이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움에는 우리나라 사립 미술관 중 가장 최고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멤버십을 가입해 두면 이때문이라도 더 자주 리움에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리움의 멤버십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움의 컬렉션, 리움의 기획전시를 자주 방문하고 그들이 선정한 작가를 빠삭하게 기억해 두고 싶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런데 얼마 전 문자가 왔다. 멤버십 전용 감상 프로그램을 휴관일인 월요일에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감상프로그램이라면 당연히 일방적인 도슨트는 아닐 테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같이 집중할 수 있는 감상 프로그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어르신 대상의 <낭만수요일>, 주부 대상의 <힐링목요일>, 어린이 대상의 <씽씽토요일>이 비슷한 프로그램일 것으로 예상은 되나, 나는 어느 프로그램도 대상이 되지 못하여 가본 적이 없다. 미술관 교육에 관한 연구, 그리고 도슨트 양성에 힘써 온 한주연 선생님이 계신 리움이라 작품 감상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은 기대 이상이었다.


4월 25일,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먼저 도착해서 출석체크를 했다.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동안 두 작품을 감상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떤 작품을 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감상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는데, 그래서 사실 모르는 작품이 나오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했다. 시간이 되자 열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모였고, 현대미술 전시장(M2) 2층 '검은 공백'으로 이동했다.

이동식 의자에 앉아 명찰에 닉네임을 쓰고, 자기소개를 했다. 이날 감상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신 김예진 선생님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검정색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슬픈 감정을 떠올리는 사람도, 좋은 감정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때까지는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좋은 감정에 대한 의견들이 많았던 듯하다. 나이가 조금 있으신 참가자 분께서는 죽음이 떠올랐지만 분위기가 쳐질 것 같아 선뜻 말씀하시기 힘들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떠올랐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진 오른쪽의 아빠와 딸 참가자는 모두를 흐뭇하게 했다.

처음으로 본 작품은 스기모토 히로시의 <슈피리어 호, 케스케이트 강>, <에게 해, 필리온>, <황해, 제주>였다. 이 작품을 7분 동안 조용히 감상했다. 7분 동안 참가자들은 말 없이 작품을 바라봤다. 앞으로 나가서 작품의 디테일을 살피기도 하고, 액자를 보기도 하고, 캡션을 보기도 했다. 평소라면 몇 초동안 볼 작품을 이렇게 길게 보니, 어떤 분들은 작품이 아닌 천장이나 조명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관찰했던 것 같다.

나는 가장 먼저 맨 오른쪽 작품에서 강이 아닌 눈밭이 떠올랐다. 아주 흐릿한 기억이지만, 어렸을 때 가족끼리 눈 쌓인 곳에 놀러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 때의 사진이 앨범에 아주 많이 저장되어 있는 것도 내 머릿속의 이미지들에 크게 기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가까이 가서 작품을 봤더니 역시나 강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세 작품들을 들여다봤다. 왼쪽의 두 물을 명도가 낮고, 오른쪽의 물은 명도가 높다. 그것으로 우리는 바다와 강을 구분한다. 명화에서도 그렇다. 바다는 어둡게, 강은 밝게 표현된다. 강 주변의 풀이 어두운 색을 띠기에 강물이 밝은가? 아니면 바다에 든 성분들이나 살고 있는 생물들 때문에 바다가 어둡게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결국 클리쉐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잘 알지 못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캡션도 안 보려고 노력했으나 마지막 즈음 궁금해서 어쩔 수 없이 봤다. 맨 오른쪽 작품만 강인 것이 맞았다. 역시 안 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7분이 지나갔다.


기억 속 무엇을 떠오르게 하는지, 작품을 하나만 선택해서 집에 걸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할 것인지 등 작품을 더 깊게 관찰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질문들을 받았고, 감상자들은 열심히 대답했다. 다양한 감정 단어들 중 작품을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료가 제공되었고, 파도 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여 더 풍부한 해석이 가능했다. 이렇게 질문이 깊어갈 수록, 참여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용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리움 멤버십 회원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미술과 미술관 관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맨 처음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쉽게 여기질 못했다. 내가 분위기를 망칠까봐, 내가 틀릴까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까봐.. 아마 이유는 다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좋습니다'라는 진행자의 피드백으로 참여자들은 점점 가지고 있는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기모토 히로시의 세 작품은 시간성과 장소성을 삭제한 작품이라고 한다. 여러 곳의 바다가 겹쳐지고, 촬영을 할 때 셔터를 오랜 시간 동안 열어두어 시간과 장소가 상관 없는 이미지가 완성되는 것이다. 작가는 원시시대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이 온전히 같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지평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나는 어렸을 때의 눈밭을 떠올렸고, 지루하게 선명하기 보다는 흐릿한 작품에 더 관심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품 해석엔 답이 없고, 나만의 감상을 가지고 평소에는 할 수 없었던 생각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예술경험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감상한 작품은 송수남 작가의 1988년도 작품 <묵상(나)>였다. 이 작품도 역시 잘 모르는 작품이었다. 이 바닥에서 일한 기간 치고 나는 참 작가나 작품들을 모르는 편인데, 이 프로그램에 있어서만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정보도 없어야 이 프로그램에 온전히 집중하여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5분 동안 작품을 들여다 봤다. 이번엔 각자의 작품 해석, 그리고 이 작품을 누구에게 어떤 뜻으로 선물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앞 작품에서 작품 해석을 위한 쉬운 질문들을 주고받았기에 두 번째 작품에서는 바로 해석이 들어간 것이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야외에서 전시되었던 이승택 작가의 깃발 작품이 떠올랐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가까이 있는 획은 진하게, 멀리 있는 획은 연하게 그려져 있어 추상같아보이지만 원근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네모 반듯한 모양들이 마치 높은 빌딩들같이 보였다. 이내 나를 가로막는 울창한 숲이 되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나에게 헤쳐나가야 할 과제들로 앞길이 막힌 듯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앞길이 많이 남은 내 또래의 직장인들에게는 선물하기 어렵고, 내 주변의 어르신들 중 크고 힘 있는 획을 좋아하는 분께 선물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수남 작가는 대숲을 그렸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것이 얇은 깃발의 형태를 띤, 앞으로 헤쳐나갸야 할 것들의 이미지로 완성된 것이다.


이형구 작가의 조각작품.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고 하는데, 가지 못하니 이 작품으로 대리만족.

나는 직업적으로 작가를 만날 수밖에 없는데,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을 전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작가들에게 듣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바로 '고맙습니다.' 이다. 현대/동시대미술 속에서의 작가들은 본인이 만든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해주는 피드백을 듣고 힘을 낸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나 기획자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한다며 스스로를 바보취급한다.

구성주의 교육에서는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사람을 틀에 맞게 재단하지 않고, 어떤 정보를 제공했든 각자의 선험적 기억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구성주의 이론이 20세기 후반부터 유행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학창시절을 보내고 난 이후인 것 같다. 더 똑똑한 사람 앞에서는 내 의견을 말하기가 힘들고, 작가의 의도대로 모두가 그림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들고, 나는 미술을 모르니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설명을 해 줘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회사 CEO, 미술 마니아, 연세가 많은 분 등 각자보다 어떤 면에서 지식이 더 많을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감상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진행자 선생님의 '좋습니다' 외에도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앞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을 해석하는 클루가 되었다' 등등.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고 이러한 해석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휴관일이라 정문이 닫혀 있어 주차장을 통해 귀가했다. 이것마저 새로운 경험이다.

이러한 작품 감상법을 슬로우 감상 운동, 또는 VTS라 부르는 것 같다. 내가 느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의 말과 시선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다(그랬기에 사전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더 많은 미술관에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미술관에서 작품에 의자를 놓고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에 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이 나에게 의미가 되는 그런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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