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전여전, 내 콩, 내 팥

by 김봄빛


"엄마, 나 수영할래요."

“이 겨울에 무슨 수영이야. 추워서 안 돼.”

“아아앙, 할래요.”

“지금은 겨울이야. 물놀이는 여름에 하는 거란다. 지금은 추워서 안돼.”

“안 추워요. 할 거예요. 아아앙.”

몇 번을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네 살난 딸과 입씨름을 하느라 진이 빠졌다. 그 당시 우리 집 뒷마당엔 수영장이 있었는데 딸은 제 오빠랑 놀면서 수영을 혼자 배웠다. 처음엔 공기를 잔뜩 불어 넣은 튜브를 양쪽 윗 팔뚝에 채운 후 수영장에 들여보냈다. 팔뚝에 찬 튜브 때문에 가라앉지 않으니, 딸은 제 오빠와 함께 재미있게 물에서 놀았고 어느 날부터는 튜브를 차지 않고도 그냥 놀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신나게 물놀이를 했던 딸은 어느 겨울날에 문득 수영장에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거실 문을 열고 바깥이 얼마나 추운지 느끼게 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난감했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살던 곳은 겨울에도 그리 많이 춥지 않다. 그렇지만 수영을 하기에는 추워도 너무 추운 날씨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체험이 나을 성싶었다. 딸에게 수영복으로 갈아입혀 주고 맨손체조를 시킨 다음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발만 담가보고 포기하고 들어오려니 했다. 그러나 수영장으로 달려간 딸아이는 발을 담그기가 무섭게 삽시간에 가슴팍까지 물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순간 딸의 조그만 심장도, 나의 부은(?) 간도 동시에 쪼그라들었다. 딸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수영장에서 나왔고 나는 딸의 온몸을 문지르며 체온을 올려주느라 혼이 났다.

엄마가 언젠가 내게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어느 겨울날, 네 살쯤 먹은 내가 엄마 속을 뒤집기 시작했단다.

“엄마. 나 그 옷 입을래요.”

“안돼. 이 겨울에 무슨 여름 원피스를 입겠다고. 추워서 감기 걸려.”

“아아앙, 입을 거예요. 안 추워요.”

“안 된다니까.”

“입을 거예요. 아아앙”

엄마도 어린 나를 달래느라 진을 뺐을 터이다. 그러다 급기야 엄마는 내게 여름 원피스를 입혀주고는 대문 밖으로 날 내쫓으셨다(?). 비로소 엄마 말을 온몸으로 절감한 내가 백기를 들고 울더란다.


엄동설한에 여름 원피스를 입겠다고 우긴 어린 나나, 겨울에 물놀이를 하겠다던 내 딸이나 똑 닮았다. 유전자도 공유하고 삶도 공유했으니 닮는 건 당연하겠지만 재미있는 모전여전이다. 내 딸은 미래에 네 살쯤 먹은 제 딸과 또 어떤 일로 씨름을 할까? 산다는 건 어쩌면 유전자 남기기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가운데 희노애락애오욕을 겪으며, 그래도 나를 닮은 내 콩이 있고 내 팥이 있어서 한세상 기꺼이 이고 지고 또 메고 사는 것이리.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살짝궁, 치명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