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늦바람이 났다.
그와의 '밀당'이 이팔청춘 젊은이의 밀고 당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맛은 고소하여 깨를 볶는 듯하고 새콤하여 청량하고 때로는 씁쓸하니 달콤하다. 그는 내가 부르면 나를 찾아오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때론 내가 그를 만나고자 몇 날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고, 때론 뜬금없이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한다. 밀당의 솜씨가 현란하다. 변화무쌍한 그이지만 내겐 기쁨이고 행복이다. 그와 만나면 내 생각 따윈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이끄는 대로 나는 따라갈 밖에. 나는 그의 포로다.
새벽에 그의 생각에 눈을 뜬다. 눈을 뜨자 그의 생각이 난 건지, 그의 생각에 눈을 뜬 건지 알 수 없다. 앉아도, 서도 온통 그의 생각뿐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하였는가? 과연 나는 항구이고 그는 배다. 그러기에 나는 매일 꽃단장을 하고 그를 맞을 때를 기다린다. 언제라도 그가 찾아오면 나는 그를 놓칠 수 없기에.
그는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짓궂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가 찾아오면 나는 어떻게 그를 온전히 내 것으로 사로잡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이 옷을 입히고 저 구두를 신겨볼까? 그의 체취에는 어떤 향수가 더 어울릴까? 이 넥타이보단 저 게 더 낫겠지? 그가 더 돋보이도록 매무새를 다듬고 또 매만진다.
사랑은 열병이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그 색깔은 붉고, 빈속에 한 모금 넘긴 와인처럼 내 속은 짜르르해진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 했다. 늦바람이 더 무섭다. 어찌하여 그를 이제야 만났는가. 이리도 가슴 뜨거운 연애를 진즉 시작했더라면 내 삶은 더 풍요롭고 깊었을 것을…. 내 인생의 여름이 끝날 무렵 그를 만난 게 못내 아쉽다. 손 잡고 함께 가보지 못한 봄 소풍이 그렇고, 내 속살이 뽀얗고 윤기 났을 때 비키니를 입고 그에게 뽐내보지 못한 여름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겐 가을과 겨울이 남아있다. 그와 함께 엮어갈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그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기대하고 이루어보자.
처음엔 그냥 그가 좋아 만났다. 시간이 갈수록 그를 향한 내 사랑에 욕심이 난다. 그럼 안 된다고? 아내의 도리가 아니라고? 괜찮다. 남편은 이미 나의 정부를 알고 있다. 나도 그의 정부를 안다. 남편은 젊었을 때부터 우리 집 방 한 칸에 버젓이 그의 애첩과 살림을 차렸다. 알고도 눈 감고 산 세월이 서른 두 해를 넘겼다.
그 애첩의 성은 ‘컴’이요 이름은 ‘퓨터’이다. 그녀의 이름에서 버터 냄새가 풍기는 건 그녀의 조상이 외국에서 온 까닭이다. 나는 그녀를 ‘컴니은’이라고 부른다.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할 조강지처 신분에 대놓고 ~년이라 할 수 있나. ‘니은’이면 족하다. 남편은 나의 정부를 ‘그르쓰키’라 부른다. 러시아 근처 어디쯤에서 온 듯한 삐딱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 그의 본명은 ‘글쓰기’이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정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의 ‘맞바람’을 서로 응원한다. 우리는 막장인가, 최신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