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첫날 한국영화
이토록 섬세하고 고혹적인 사랑이라니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헤어질 결심>에 대한 기사가 메인에 뜬 걸 봤다. 물론 내용은 읽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 다른 글을 잘 안 읽는 편이기도 했고, '잘 포장된 불륜 영화'라는 수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고, 빗길을 뚫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영화였다. 한 사람에게서 출발한 말과 글이 '마침내' 어딘가에 도착해 의미화되고, 해석되는 그 순간을 눈여겨보게끔 만드는 영화였다. 그래서 관객은 '마침내' 일어나는 이상한 화학작용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영화. 인물들에게 출발한 말과 글이 번역되고, 교환되면서 조금씩 섬세해지는 감정들은 넘치게 폭주하지도, 부족해서 메마르지도 않은 채 긴장강도를 끝까지 유지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씬의 밀도만큼이나 감정의 긴장 강도가 끝까지 상승하면서 진행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오래전 데이비드 밴의 <자살의 전설>을 읽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줄, 한 줄을 새기며 페이지를 넘겼던 것처럼, 장면이 지나가는 게 그렇게 아깝고 아쉬울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 스크린을 멈춰 세우고 그 장면에서 길게 호흡하고 싶었다. 말의 전달이, 글의 교환이 어떤 식으로 전환되는가, 해석되는가 대체되는가에 대한 생각도 이어졌다. 간단히 사랑에 대한 은유라고 치부하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묵직한 장편소설을 읽어낸 기분이 들었다. 다시 곱씹고 싶은 장면이 있기에, 나는 곧 다시 영화관을 찾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중국에서 이주해온, 탕웨이가 연기한 송서래는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두 번이나 미망인이 되는데, 남편들의 반복된 죽음을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조사를 위해 경찰서에 온 서래는 한국말이 서툴다는 소개로 말을 시작한다. 남편의 죽음에도 놀라지 않으며, 죽음에 대해 형사가 말해주기보다, 죽음의 장면을 찍은 사진을 직접 보겠다고 한다. 더러 말이 막힐 때는 미소를 머금기도 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파면 팔수록 묘한 구석이 많다.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도왔던 과거를 가진 것도 묘하다. 이토록 아이러니컬한 삶의 변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서래는 불행한 자기 역사를 반복하는 인물인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이유를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변명처럼, 폭로처럼. 헤어질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이행하기 위해 두 번째 결혼을 감행할 정도로 사랑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의 결혼, 남편들의 사망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건조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수용하는 서래. 그랬던 서래 앞에 선 형사 장해준. 해준과의 만남은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고 만다.
박해일이 연기한 장해준은 형사의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자부심으로 점철된 해준은 벽 한 면에 미결 사건 사진들을 전시함으로써, 내내 그것을 들여다보고, 곱씹는다. 벽면 가득 잔인한 사진들로 전시된 가운데, 서래의 사진들이 벽 한쪽을 채우고 있다. 해결되기 전까지는 해준을 떠날 수 없는 사건들. 서래 역시 해결해야 할 사건이며, 알아내야 할 사건이었다. 건조한 눈동자에 안약을 종종 넣어가면서 해준은 ‘바라본다.' 해준의 '봄'은 단순한 응시가 아니다. 봄으로써 '앎'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 인물이기에, 미결 사건을 자신의 방 한 벽에 전시하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처럼 느껴진다. 보는 것을 멈출 수 없기에, 잠에 들기가 어렵다. (어쩌면 해준은 '오이디푸스'가 아닐까.)
단정하고, 철저하며, 투철한 신념과 자부심을 가졌던 해준은 종종 모서리가 살짝 틀어진 것들을 바로 맞춘다. 제 위치를 정확히 맞춰서 정돈한다. 모든 상황이나 현실을 최대한 장악하고 정돈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해준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그랬던 해준에게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해준이 지키던 품위는, 그 윤리는 서래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붕괴'된다. 표면적으로 사건은 종결되지만, 서래라는 여인이 흔들어버린 해준의 윤리는 그동안 해준이 지켜왔던 자기 엄격성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주말부부로 사는, 주말 섹스가 루틴이 되어가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해준의 삶에 난데없는 파문이 일어난다. 도저히 통제할 수도, 장악할 수도 없는 '사랑'이라는 사건이. 썰물에 몸이 휩쓸리듯, 해준은 파도에 몸을 내던진다. 사랑에 빠진 해준의 얼굴은 미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집중할 때만큼이나 몰입감에 젖어 있다.
어쩌면, 해준은 정도를 지키며, 최소한의 자기 방어선을 지켜내는 관념 안에서의 일탈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서래는 그렇지 않았다. 서래와 해준이 주고받은 말과 글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언어 능력의 차이, 그리고 해석 범위에 따라서 좀 더 확장되어, 혹은 보다 축소되어 전달되거나 전환된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당부나 연민에 가까운 말이었을 수 있는 해준의 일상적인 말도 서래에게는 사랑으로 교환된다. 그리고 그건 영원히 미결 사건으로 남고 싶은 열망으로 대체된다. 서래가 밥을 챙겨주던 고양이가 선물로 물고 온 까마귀를 묻으며 고양이에게 중국어로 한 말을 번역기로 돌리는 해준, 해준이 ‘심장’으로 이해한 말은 사실 ‘마음’이었다.
“다정한 형사 아저씨의 마음을 가져다 주렴’에서 ‘마음’이 ‘심장’으로 오역되는 순간, 로맨스는 하드코어가 될 수밖에,
사랑은 낯설고, 매혹적이며, 발끝이 들릴만큼 아득하게 온몸을 떨게 하는 이상한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언어에 담기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일상이 되고, 루틴이 만들어지고, 경제관념이 들어오면 그 감정이, 사랑이 유지될까. 사랑이 훼손되지 않는 방법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밖에는 없을 지도.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타자다. 사랑이라는 상황으로 두 사람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거라는 환상 자체가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나의 사랑 언어와 그의 사랑 언어가 영원히 하나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대체할 수 있는 언어만 존재할 뿐이니까.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서래가 선택한 것처럼, 영원히 미결 사건으로 남아야만,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해야만 진짜 사랑으로 실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성조가 발달한 언어 때문인지, 탕웨이의 목소리는 진공관이 떨리는 것처럼 공기를 흔드는 공명음이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말에 그림자가 따라붙는 것처럼.
인물들의 대사에도, 행동에도, 그리고 프레임 그 자체에도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이 말하고 싶은 매혹적인 고전적 사랑보다, 사랑이 교환되는 말에 집중해서 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나의 말은 너에게 어떻게 번역되고 해석될까.
마침내, 나를 사랑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