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라면

<너, 뭐 먹고 살쪘니? - 12. 라면 2>

by 김봄

서럽고 고달팠던 시절 내 속을 채워준 라면. 나를 키운 건 8할의 라면이었다.

그래서 라면을 몰아 먹던 시절부터 나는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살게 되었다. 물론 라면은 죄가 없다.

규칙적이지 않은 식사, 폭식, 소화되기 전에 눕는 습관, 그리고 술. 나열하기도 창피할 정도로, 이래도 역류성 식도염에 안 걸려? 싶을 정도로 몸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 30대까지만 해도 술을 잘 들이켜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그건 흉터 같기도, 훈장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흉터와 훈장은 그 채로 고스란히 내 몸에 남았다.


더 이상 몸을 망칠 수가 없었던 나는 애꿎은 라면을 끊었다. 대단한 각오나 결심이 라면을 끊게 만든 건 아니었다. 내 몸이, 라면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먹히지가 않’았다. 몸의 호소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몸이 내는 여러 호소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맨 마지막에 다룰 생각이다.)


그렇게 라면을 먹지 않고 지낸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한예종 졸업을 앞둔 상황이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신춘문예도, 문예지 공모에도 당선되지 못한 채였다. 몇 번 운 좋게 최종심에 올라 단평을 받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공부를 새로 하면 될까 싶어 다시 학교를 들어간 것이었는데, 역시나 한계에 다다른 것인가 싶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계속 글을 쓰면서 살고 싶었고, 글을 쓰는 자로 남고 싶었다. 해왔던 것처럼 그냥 계속 쓰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꿈을 위해서 몇 년을 더 헐어내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게 느껴졌다. 30대 중반이었으니까. 해왔던 것처럼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도 힘들었다. 나에게는 최초에 다시 학교에 가자고 마음을 먹었던 동력이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초심이 남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니까.


나는 제주에 내려갔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무작정 올레길을 걸었다. 11월 바람 찬 제주의 올레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매일 홀로 바람 한가운데를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아쉬워했고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길 위에도 답은 없었다. 12월에도, 1월에도 나는 그냥 걷기만 하고 돌아왔다. 한라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매번 오르지 못했다. 홀로 오른다는 건 너무 막연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2월 졸업을 앞둔 설 명절 연휴에 나는 또 제주에 갔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간 것이었다. 그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는 젊은 스텝들이 많았고, 그보다 많은 젊은 손님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커피와 맥주를 마시며 일반적이고 익명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중에서 8인용 도미토리에서 만난 세 명의 친구들과는 조금 가까워졌는데 나보다 좀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격 없이 나를 대해주어 마음이 편했더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 폭설이 지나간 다음날이었다. 나는 제주 블랙야크 대리점에서 아이젠과 스패츠를 사둔 터였다. 우리 네 명이 한라산에 가겠다고 하니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차로 한라산 입구까지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승합차를 타고 눈이 덜 치워진 길을 달려 영실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린 후라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중산간 근처에서 승합차의 타이어가 헛돌기 시작했다. 모두가 차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어쩌면 당연하고 사소한 사건이었는데, 나는 내 인생 전체를 대입해 비관했다. 뭐가 안 되려니까 이렇게 일이 꼬이는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지나던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체인을 감은 차였다.


그리고, 운전석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보인 아저씨는 선뜻 영실 입구까지 우리를 데려다주겠노라고 했다. 자기는 근처 파출소 순경이며, 지금 딸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며,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무사히 영실 입구에 다다랐다. 가희라는 친구는 원래 산을 자주 탄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지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잘 이끌었다. 사방 천지가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을,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내 다리가 폭폭 빠지는 산길을 오르고 올라, 우리는 백록담 아래 대피소에 당도했다.


눈이 멀 것처럼 부신 눈 속에 몸을 던져 숨을 골랐다.

그래 이거면 됐다.


나는 여한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데려와준 일행들에게 감사의 인사로 라면을 샀다. 대피소에서 파는 라면은 육개장 용기면이었다. 용기에서 피어오른 김인지, 입김인지 모를 운무가 가득한 산 위에서 우리는 덜 익은 면을 아삭 거리며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3년 만에 먹는 것이라서 그런지, 오르고자 했던 한라산을 올라서 그런지, 눈빛이 너무 환해서 그런지, 생각지도 못한 귀인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라면은 단연코 한라산에서 먹었던 라면이다.


산에서 내려와 나는 서울로 복귀했다.

글 쓰며 사는 삶을 깨끗이 포기했다. 작은 교습소 같은 걸 차려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민음사 대표에게서 온 전화였다.

김봄 작가님 전화 맞죠?


나는 민음사 신인상 공모에 원고를 보낸 것조차 잊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고, 깨끗이 포기했던 마음들이 순식간에 불꽃처럼 되살아났다.


그래, 나는 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어.


이걸 부정한다면 나는 너무 많은 시간들을 내 삶에서 도려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그 전화는 참 공교롭게 나를 다시 흔들어놓은 사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단한 작가가 되기보다는 '작가'가 되기로 했던 것이었고, 아주 오랫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던 만큼, 아주 오랫동안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첫 인정을 받은 것이었기에 나는 또 다른 뭔가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을 가지고 말이다.



오랜만에 육개장 용기면을 먹었다. 한라산에서 느꼈던 짜릿하고 톡 쏘는 맛은 없다. 면은 쫄깃하지도 않고 맛은 더 강해졌다. 짜고 매운맛이 강화된 거 같은데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추억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뚜껑을 열자 김이 올랐고 추억이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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