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 먹고 살쪘니? - 12. 라면 1>
1. 아주 보통의 끼니
어린 시절, 라면은 내 삶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먹을 게 곤궁했던 시절이었고,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덕분에 우리 5남매는 나름의 방식대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엄마가 주고 간 얼마간의 돈으로는 대단한 걸 사 먹을 수 없었기에 대체로 우리는 라면을 사 끓여 먹었다. 시장통에는 10원에서 50원 정도 차이가 나는 라면을 좌판에 내놓고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우리들은 머릿속 주판을 튕겨가며 그중 좀 더 싼 라면을 사고 남은 돈으로 먹고 싶었던 빵이나 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사 먹곤 했었다. 나와 두 살, 네 살 터울의 언니들은 깻잎 부침개나 호박 부침개 같은 것도 자주 해주었다. 프라이팬을 다루는 솜씨나 뒤집개를 움직이는 손놀림이 어설프긴 했지만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불가에서 열을 올리는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10살이 좀 넘은 어린 언니들의 모습이라 엄마가 없던 시간과 공간을 꽉 채워주었던, 그 진심은 아직도 내게 너무 크게 남아 있다.
부동산 붐이 일면서 나의 부모님도 그 덕을 좀 보았다. 투자의 귀재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왔던 것이었다. '벼락부자', '졸부'와 같은 말이 있을 정도로 어느 날 갑자기 시세차익으로 인한 부를 얻은 이들이 많았다. 모두에게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희망'이란 말이 환상처럼 들리던 때는 아니었으니까.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뻗어나간 호박 덩굴을 직접 목격하는 것처럼 생생한 성장의 순간을 매일 목도하던 시절이었고 부모님은 큰 고민과 실패 없이 그 기회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부모님은 세주던 집을 헐어 새집을 올렸다. 건축업자는 동네에서 철물점을 하던 장 씨 아저씨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장 씨 아저씨를 전문가가 아니라고 쉽게 판단했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건축가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집이 다 지어지고 더 명확해졌다. 하자보수 때문에 엄마는 매일 시름에 잠겨 있지 않으면, 누군가와 목소리를 높여 싸워야 했다. 누수가 제일 심한 문제였는데, 집을 다시 짓기 전에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좀 보태서 말하자면, 집을 짓는 것만큼 하자보수 하는데 돈이 들어갔다.
어쨌든, 새 집으로 이사를 들어오고 나서부터 우리 형제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집에 용량이 큰 냉장고를 들였고, 우유를 배달시켜 5남매가 골고루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런 이후부터는 오히려 차려놓은 밥을 안 먹고 라면을 찾아 먹기 시작했다. 끼니였던 라면이 기호식품으로 변한 것이다. 일주일 내내 라면만 먹던 남동생이 변비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했었는데, 엄마는 남동생이 몸으로 증명해 보인 라면의 유해성을 몇 번이고 되뇌곤 했었다. 우리가 라면으로 내내 끼니를 때우던 때를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엄마는 꽤 오랫동안 집들이를 했다. 우리를 먹이려고 준비할 때보다 더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 친목계 회원들을 맞았다. 고스톱을 치는 모습도 보이곤 했는데, 6학년 바른생활 소녀였던 나는 그 판에 뛰어 들어가 하지 말라고 울상을 짓기도 했었다. 어른들의 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을, 나는 화투놀이 자체를 퇴폐와 타락으로 해석하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시장통에 사는 친구 J의 엄마가 고스톱을 치다가 집을 나간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다. 친구들이 수군대던 것을 들어서 더 그랬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2. 폭식주의자는 라면을 좋아하지.
간단히 먹던 라면을 또 미친 듯이 먹을 때가 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여러 학교를 다녔다. 내 삶의 3분의 2 이상을 학교에 적을 두고 지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1살 때부터 등록금은 내 손으로 벌었고, 그 외 용돈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늘 열심히 살아야 했다.
서른이 넘은 시점에도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학원에 강의를 나가는가 하면, 교열 알바를 하기도 했다. 산다는 건 너무 치열하고 숨 막히는 일이기도 해서 가끔 나는 내 부지런함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두려웠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즈음부터 급격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라면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탄수화물이, 그것도 라면이 당기는데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뇌의 호소가 너무나 적극적으로 나를 흔들었다. 하필 그때 내가 살던 건물 1층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여는 것만큼 나는 자주 편의점에 들렀다. 라면을 사면서 맥주도 사고, 맥주를 사면서 오징어도 샀다. 마트에 가서 장을 볼 때도 혼자 사는 사람이 먹는 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사 왔다. 그렇게 해야 속이 풀리던 때였다.
라면은 어쩌다 한 번 끓여 먹는 간편식이 아니었다. 한 번 들어올 때 왕창 뱃속으로 몰려들어왔다가 오래도록 내 몸에 머물렀다. 나는 국물 없는 비빔면이나 짜장라면을 좋아했는데, 한 개를 끓이면 언제나 부족했다. 두 개를 끓이면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계속 하나씩 더 끓여서 먹었다. 앉은자리에서 4개까지 먹은 적도 있었다. 배가 터질 것처럼 빵빵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흐려질 때 잠에 드는 게 좋았다. 그렇게 고민도, 분노도 잠시 내려놓고 잠에 빠져드는 게 익숙해져 갔다.
결국, 옹기종기 들어앉은 살들로 내 몸은 튼실해졌고 나는 역류성 식도염을 얻었다.
오랜만에 라면을 끓였다. 오뚜기 진라면 매운맛.
모든 라면은 변칙을 적용해야 맛있다. 그래서 나는 라면에 뭘 많이 넣어 먹는다.
내 손은 사진 찍으면 더 뚱뚱해지는 거 같다. 하지만 슬프지 않아. 내 눈에는 이렇게 뚱뚱해 보이지 않으니 괜찮아.
여러 번 씻은 시금치와 바라 깻잎을 준비했다. 대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사지 않았다. 요즘 요리 잘 안 해 먹는다는 소리다.
먼저 끓는 물에 수프를 넣고
둘로 쪼갠 면을 투하!
바라 깻잎을 먼저 넣고. (생각해보니 제일 마지막에 넣었어야 했는데)
시금치도 넣고
달걀이 빠질 수가 없지.
짜잔!
이런..... 넘쳤다.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게 라면 물 맞추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