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잘 있었나
오늘도 책상에 앉아
나의 컴퓨터에게 약속을 하였다네
오늘처럼 내일도 나의 유전자를 건네주리라고
더 높다란 지능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컴퓨터가 가지고 있을 유전자도
많이 저장해 놓으라는 말도 함께 말일세
먼 훗날 그 다음 날에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는
내 이름도 꼭 기억해 달라는 말을 못 박는 것이라네
이건 비밀이네만
만일 처가 허락만 해준다면
내 컴퓨터와의 재혼 주례를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걸 믿어주게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랬듯
나도 컴퓨터에게
무엇인가 대신 해주길 바란다는 걸 남겨 놓고 싶은 것이라네
혹시 우리 몇몇이 하나님에게 그랬듯
컴퓨터도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야
미리 한번 해본다는 걸 그대에게만은 고백하고 싶은 거라네
문득 새털구름 사이로 그대 손이 보이는 날을 기다리며
아침마다 한번 하늘을 보려는 버릇은
내 컴퓨터보다 먼저 그대를 만져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
그것은 친구여
나의 컴퓨터가 언제까지 살아있을런지
또한 나의 마음밭 한 가운데 지도를
다른 컴퓨터에게도 전달해 놓았는지
오직 그대만이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서라네
소나무가 빽빽한 산을 보고 오겠네
눈이 커지려는지 아파오는 걸 어쩌겠나
잘 있게
비가 올 듯하니 감기 조심하고
(1993년)
<매우 늦은 시작 노트>
영화 <ET>는 첫 직장 KIST에 들어간 1984년도에 제작되었다. 국내에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에 개봉했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PC를 대형컴퓨터에 접속해 서울올림픽 전산 업무를 완성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은 IT강국을 향한 큰 행보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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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