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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May 12. 2022

신화같은 메타버스와 꿈, 그 공통점을 들추며

꿈 같은 옛날이야기는 참 많다. 키프로스섬의 신화 속 피그말리온 왕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상상 속의 여인을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조각상이 실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사람처럼 극진히 대했다. 이에 감동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 조각상을 살아 있는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꿈이 현실이 된다는 이야기다.     


위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진정 내가 바라는 꿈을 간절히 바라면, 그리고 끝까지 노력한다면, 그 꿈은 이루어질까? 그렇게 인류 모두 간절히 원하는 꿈같은 세계가 올까? 그것이 메타버스 세상일까?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일, 하늘을 날고, 비와 눈 또 번개를 만들고, 지구를 들었다 놨다 하는 힘센 무기를 만드는 등등의 신화 같은 일이 뉴스로 종종 등장하는 요즈음이다. 누구나 가능한, 어떠한 상상도 현실이 되는 세상이다.     


수만 년 전부터 시작한 인류 문명은 그 새로운 혁명 주기가 수천 년에서 수백 년으로 줄어들더니, 급기야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수십 년으로 급속히 짧아졌다. 이를 두고 가히 컴퓨터문명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지금은 컴퓨터가 모든 일상 생활 도구의 중심이 되었으니, 컴퓨터 없이 어떠한 일도 하기 힘든 컴퓨터문명 시대임이 분명하다.      


이 글을 쓰는 나부터 손으로 쓰는 것보다 컴퓨터 키보드나 마우스/터치스크린이 더 편리하다. 즉, 어떤 것을 생각해 나열할 때도 연필과 종이를 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키보드를 두드릴 때 더 상상력이 발동하니 더욱 그렇다. 기원전 사람들이 컴퓨터를 보면, 지금 사람들이 메타버스 세계 만들 듯, ‘컴퓨터신화’를 수없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핸드폰이 손 안의 컴퓨터로 변신한 스마트폰, 일년이 멀다하고 바꾸는 이 첨단문명 기기가 너나없이 손에 익숙해졌다. 굳이 Great Reset 수순의 하나일지도 모르는 코로나19 전염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홀로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으로 스마트폰과 같은 기계가 친구보다 더 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도, 스마트폰이 단 몇 분이라도 내 팔길이 안에 없으면, 허전해지고 멍해지곤 한다.     


스마트폰이 생활화 속도가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현실세계를 게임 속에 투영하려는 현상이 빨라졌다. 사회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려는 시도가 앞다투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세상을 내 마음껏 사는 0.01% 미만 사람은 현실을 더 좋아하겠지만, 그 외 사람들은 가상세계로 몸을 틀고 있을 것 같다. 내 몸은 현실에 있는데, 내 마음은 이미 꿈 같은, 메타버스 같은, 가상세계로 들어가 좀체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란 것. 현재, 가상세계의 문은 누구나 평등하게 열려있기 때문이리라.     


청소년 시절, 만화를 보거나 유행하는 연예프로그램 심취 또는 게임에 몰입할 때가 있다. 이때마다 무슨 죄지은 것처럼 어른들 몰래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1980~2000년 태생의 MZ세대, 특히 2000년 이후의 알파세대, 이제 그들이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하든, 나는 피하듯 앞만 보고 똑바로 지나간다. 나도 그들처럼 메타버스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배워야겠다는 심정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지금 컴퓨터 문명의 출발선을 지나고 있다. 영광일까?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최근, 메타버스 기술의 베이스캠프라 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은 정교한 그래픽해상도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고도의 디스플레이 장치 발달로 인해 입체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양자컴퓨터와 양자통신의 시간 초월 의미가 융합되면서 내 아바타 등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바타는 인공지능/빅데이터/로봇/생체공학 기술 등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이제 ‘특정 인간이 나의 아바타’가 되는 수준을 예고하고도 있다.   

   

돌아보면, 나는 어린 시절, 잠자다 깬 적이 많았다. 꿈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꿈에선 참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하늘을 많이 날아다녔다. 너무 빨리 달리다 갑자기 벽에 부딪히거나, 높이 올라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일이야 부지기수였다. 어떤 땐, 아예 벽이든 땅이든 그냥 통과하기도 했다. 물론, 몇 번 아픈 것 같아, 가끔은 살짝 몸을 벽과 땅에 갖다가 대는 요령도 눈속임처럼 부리기도 했다. 메타버스 가상세계에서도 이런 요령을 부릴 수 있을까?     


아마도, 내 꿈 이야기는 ‘인간이 처음 인간으로 진화할 때부터 누적된 일련의 경험치가 유전자에 새겨진 일부일 것’이라는 엉뚱한 말을 하는 지금이다. 맞을 거다, 인류가 수백만 년 거치면서, 70억명 이상 되기까지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을 거다. 이러한 독백이야 무한대 경우의 하나겠으나, 이 상상의 독백들이 오랜 기간 서로 엮여 현재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 분명 맞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래, 맞다.’라는 자문자답 이전에, 그저 살아있다는 지금이 감개무량일 뿐이다.     


그렇다. 꿈 이야기는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다. 굳이 거창하다 싶게 나열한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꿈 이야기가 요즘 돈의 가치로 떠오르는 가상세계라는 메타버스와 무슨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아서다. 모두는 당장 어떠한 실체도 없다는 것이요, 설령 메타버스 세계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꿈에서 깨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모두 남의 것 같아 허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바타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는 메타버스 세상. 어쩌면 나는 꿈속에서 내 아바타가 되어 꿈꾸듯, 꿈같은 메타버스 그 가상세계로 들어가게 되리라. 그것도 순식간에 나만의 타임머신 타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세상으로 순간 이동하듯 말이다. 이럴 땐, 메타버스 그 세상이 곧 꿈속이라 우겨도 된다. 누가 아니라 대답할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으니. 

    

꿈은 살아가는 동안 잠재되었던 일부 느낌이 다르게 상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메타버스라는 상상을 만든 것은 ‘꿈을 현실로 구현하자’라는 끊임없는 인간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누구라도 메타버스 세상에서만큼은, 아주 구체적으로 오래 기록되어,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먼저 가꾸려 놓고 들락날락하고 싶은 욕망 말이다. 물론 이도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욕망도 합법화시키면서.     


그럴 것이다. 꿈이라는 개개인 미지의 세계에서 가상공간이라는 공공의 메타버스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엔 ‘인간이 기계가 되고, 동시에 기계가 인간이 되는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수도 없이 거듭할 것이다. 미래 그 어느 시점, 그 누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메타버스 그 가상세계요, 다시 똑바로 보니 이 현실세계라며, 진정 꿈이 사라진 예전 시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이 지금이라는 그 옛날을.     


새로움은 언제나 혼란을 가져왔고, 다시 새로움이 혼란을 잠재우듯, 새 이론과 그 기술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인간이 생체컴퓨터를 새로운 장기라며 이식해 훈장처럼 심고, 유행처럼 그때마다 옷이라며 갈아입고, 컴퓨터 에너지원이라며 알약을 먹고, 내 아바타와 서로 꿈속 같은 ‘메타버스 가상세계에서 영원불멸을 꿈꾸는 날’이 섬뜻 다가설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꿈 대신 메타버스 세상에서 사는 연습을 미리 해야 하리라. 현실세계의 내 시간을 줄이고, 그 줄인 시간만큼 가상세계에서 사용해, 그 가상세계에서라도 행복해지는 연습을.


어허, 가상세계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다니! 나는 아직 꿈보다 해몽이 좋았으면 하는가 보다. 이도 꿈일까? 참 서먹서먹하다. 과연 인간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원했던 가장 오래된 꿈은 무엇일까? 인류의 영원한 존속? 모두 더불어 어울려 사는 세상? 아니, 살아생전 지속 가능한 서로의 행복? 누구라도 평생 어깨에 올려놓고 따져보기에서는 그 무게가 너무 버겁다. 그러나, 그래도 믿어야 한다.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꿈.      


그래, 우리 인간은 오랫동안 꿈이 있기에 누구나 행복하다는 말을 신화처럼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꿈이란 작고 단순할수록 행복하다’라는 것이리라. 그 단순한 꿈과 꿈을 연결하는 순간이, 그 과정이, 얼마나 행복한가! 메타버스 가상세계도 아주 천천히, 또 단순하게, 더 조금씩 잘 준비하는 동안, 우리 생활에 다가왔으면 좋겠다. 저 절대자본가 손에 의해 순간마다 조율되는 것이 아닌, 인류 모두가 준비된 상태에서 가상세계를 넘나들었으면 하는 꿈 때문이다.


나는 이즘에서 다시 단순해지기 위해, 지금의 꿈, 내 희망은 무엇인가 계속 자문해 보고 싶어진다. 몇 번, 우리나라나 가족이 오래 넉넉해졌으면 했다. 최근엔, 참 우습게도, 내 꿈이 더 작아지고 단순해지면 어떨까 하여, 여기 다시 확인해 본다. 예를 들어,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저녁까지 나와 가족, 아프지 않고, 함께 저녁을 나누는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다시 잠들어 아름다운 꿈을 꾸면 좋겠다. 물론, 내가 아는 분들과도 가끔. 이 꿈도 메타버스 세상에선 신화라 불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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