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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더밍 Nov 11. 2020

샛노란 스타킹

지니는 나의 첫 친구이자 적이자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다. 

지니의 생일은 11월, 나의 생일은 12월. 날짜를 세면 채 한 달도 되지 않는데 지니는 항상 나보다 앞서는 게 많았다. 아니, 많았다고 주변에서 성화였다. 


먼저 지니는 나보다 항상 키가 컸다.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항상 작은 순서로 1, 2등을 다투던 나였다. 나는 마음처럼 자라지 않는 키에 화가 나는데 친척들은 만날 때마다 지니와 나를 같이 세우고선 저들끼리 키가 작네, 크네로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그러다 내가 성질내며 소리라도 지르면 아랑곳 하지 않고 어린애가 어른 앞에서 소리 지른다며 나무라기 일쑤였고 마지막은 항상 지니에게 언니라고 부르라는 놀림으로 이어졌다. 


또 지니는 얼굴은 주먹만 한데 특히 눈이 참 크고 예뻤다. 반면에 나는 쌍꺼풀 없는 툭 튀어나온 눈 덕에 사진을 찍고 나면 실제보다 훨씬 못생기게 나왔고, 엄마가 자랑하던 백만 불짜리 이마는 내 또래에서는 그저 빛나리로 통하는 광활한 이마일 뿐이었다. 분하다 분해. 동네 오빠들은 죄다 지니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분해 죽겠는데 지니는 그럴 때마다 항상 새침하게 웃었다. 망할 년. 고고한 척은.


게다가 지니네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더 부자처럼 느껴졌다. 지니의 집에는 항상 새로 나온 미미공주들이 있었다. 지니의 신상을 보고 집에 와 울고불고 생떼를 부려 겨우겨우 미미공주를 하나 얻게 되면 그 다음날 지니의 집에는 다른 신상 미미공주가 와 있었다. 그럴 때면 괘씸한 마음에 지니의 미미공주의 립스틱을 몰래 훔쳐 와 내 미미공주에게 발라주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 엄마는 이미용에 관심이 없는 터라 내게도 남자아이 같은 무채색의 옷들을 주로 입혔는데 지니는 항상 치마에, 원피스에 밝고 예쁜 옷만 입었다. 얼굴도 예쁘고 태생이 마른 몸이라 잘 어울렸다. 그것마저도 짜증스럽고 분했다. 왜 나는! 왜 나는!!


마지막으로 지니에게는 한쪽만 들어가는 예쁜 보조개가 있었다. 본인도 본인이 예쁜 걸 알았을거다. 나처럼 우왁스럽게 소리 지르며 목이 터져라 웃지도 않았다. 지니는 항상 새침하게 웃었다. 고학년 예쁜 언니들처럼. 그 모습이 참 예쁘면서도 얄미웠다. 망할 년. 끝까지 도도한 척은.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너무나도 갑자기 지니의 부모님이 경제적 이유로 야반도주를 했고 지니는 외할머니 집으로 옮겨졌다. 그때부터 지니는 예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차갑고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보조개가 가끔 씰룩이기도 했지만 그건 함박웃음보다는 조소에 가까운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갖고 싶다는 말이면 언제든 무엇이든 사주던 지니의 엄마는 사라졌고 가난과 절약을 기침처럼 내뱉는 외할머니가 곁에 남았다. 지니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입었던 남자아이 같은 무채색의 옷들만 입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계가 뒤바뀌고 있었다. 급변한 지니의 상황에 연민의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지니가 힘들어할수록 내 마음속에는 짜릿한 통쾌함이 생겨났다. 그렇게 잘난척하더니 꼴좋다. 이제는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낫다, 뭐 그런 생각들이었던 것 같다. 한동안은 지니를 떠올리면 이상한 우월감에 입꼬리가 올라가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몇 해 뒤 어린이날에 엄마가 지니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다 같이 광주에 패밀리랜드로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이 날을 위해 아껴두었던 샛노란 스타킹을 찾아 서랍장을 뒤졌다. 양말칸에 없으니 속옷칸에 있으려나. 열심히 속옷칸을 뒤졌다. 어라? 왜 없지? 안방 서랍장에 있으려나. 콧노래를 부르며 안방 문을 거칠게 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당황과 배신, 억울함이 뒤엉켜 나는 주저앉아 악을 쓰며 엉엉 울었다. 행여 찢어질까 고이 모셔둔 샛노란 스타킹이 지니의 다리에 신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니는 당황했고 나는 분노했다. 엄마는 다짜고짜 나를 방에서 질질 끌어내며 지니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나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내가 얼마나 아껴둔 스타킹인데. 왜 지니는 항상 내게 소중한 걸 앗아가는 거냐며 울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엄마는 나보고 철딱서니 없는 애라며 욕심이 저렇게 많다고 혀를 끌끌 찼다. 아냐. 아냐! 난 그런 게 아냐!! 나는 항변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침대에 걸터 앉아 어둠이 더 짙게 깔린 낯빛의 지니는 조용히 스타킹을 벗어 미안하다며 내게 줬다. 그리고 본인의 무채색의 헐렁한 바지를 조용히 입었다.


나는 큰 울음으로 헐떡이는 몸이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 씩씩하게 눈물을 훔치고 그 샛노란 스타킹을 신었다. 절대 너는 내 것을 뺏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했지만 이상하게도 샛노란 스타킹을 찾아 서랍장을 뒤지던 그때의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알록달록한 예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내 뒤에 앉아 있을 지니가 자꾸만 생각났다. 지니는 지금 나를 어떤 생각으로 보고 있을까. 분노일까. 부러움일까. 무기력일까. 수치심일까.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나는 왜 지니를 미워했을까. 왜 좋아했을까. 왜 시기했을까. 그리고 왜 미안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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