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에서 벗어나려고 무작정 걸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2일 차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이불속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가끔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미치도록 귀찮았다. 이불속에 누워만 있다가 자연사하는 상상을 해봤다. 며칠이나 걸릴까 궁금했다. 이런 내 모습을 잘 아는 친구가 오늘은 제발 어디라도 나갔다 오라고 했다.
“운전하기 싫어.”
“운전하지 말고 걸어.”
에어팟만 챙겨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우리 동네에는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있다. 한 바퀴를 다 돌면 6km 정도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요즘 즐겨 듣는 오디오를 켰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걷고 있는 내 발을 바라봤다. 내가 걷는 게 아니라 길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트레드밀에서처럼 나는 보도블록을 계속 뒤로 밀었다. 그러다 지구라는 커다란 공을 굴리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두 발로 지구를 굴리고 있는 거고,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굴리는 지구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생명은 태어나고 또 어떤 생명은 지구를 떠나고 있겠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꽤 많이 걸었다. 살짝 덥기도 했다. 이제 그만 걷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미 동네 반 바퀴를 돌아버렸다. 앞으로 계속 가도 남은 반바퀴를 돌아야 했고 되돌아가도 남은 반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게 그거 같지만 기왕이면 한 바퀴를 다 도는 게 좋을 것 같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잘 발라먹은 생선가시 같은 겨울나무들을 좋아한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는 나뭇가지들을 좋아한다. 가끔 다 말라비틀어졌는데도 꾸역꾸역 매달려있는 갈색 나뭇잎들을 보면 떼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오지랖인 것 같아 그냥 지나쳤다.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다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유독 칼바람이 부는 구간이 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뺨이 갈라지는 것 같은 그 바람이 오늘따라 시원하고 개운했다. 잠시 멈춰서 바람을 맞았다. 바람을 느낄 때마다 이 공기가 어디에서 온 걸지 생각한다. 누구의 콧구멍을 거쳤다 나에게까지 온 걸까. 그 사람은 안녕할까. 뭐 이런 상상. 산책하는 나는 상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동백나무가 보였다. 진한 분홍색 꽃에 노란 수술, 그리고 붉은빛이 섞인 초록 잎을 보고 있으면 어렸을 적 할머니 댁에서 본 이불이 생각난다. 노란색 장판이 누렇게 변해버린 방바닥에 누워 화려한 꽃무늬가 빽빽이 그려진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으면 이러다 숨 막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이불 안에서 자연사하는 상상을 했던 게 떠올랐다. 결국 나를 죽이는 건 두꺼운 이불일까, 무기력일까.
요즘 자주 죽음을 떠올린다. 내가 죽음을 떠올릴 때는 보통 도망치고 싶을 때다. 나는 자주 도망치는 사람이다. 오늘도 무기력에서 도망치려고 집을 나섰던 것처럼. 내 도망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집에 다시 들어와 무기력하게 이불을 덮고 누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칼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던 그 기분이 그리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차가운 얼음물을 한 잔 마셨다.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