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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Mar 05. 2024

번역기로 대화하는 마음

번역기 없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 학교는 특색활동으로 중국어를 한다. 아무리 초등교사가 전 과목을 다 가르치는 만능 재주꾼이라지만 중국어는 무리다. 그래서 중국어 수업은 중국어 원어민 강사와 협력 강사,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수업을 한다. 여기서 협력 강사는 중국어를 잘하는 한국인 강사다. 그러니까 학생과 원어민 선생님, 담임 선생님과 원어민 선생님이 소통할 수 있도록 통역하고 도와주는 선생님이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협력 강사가 없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고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 내가 올해 원어민 강사 관리 업무를 맡았다. 중국어도 못하는데, 통역해 줄 사람도 없이, 원어민 강사 업무를 하려니 막막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해 보기로 했다. 어제는 원어민 강사에게 1학기 수업 스케줄을 알려주러 갔다. 우리의 첫 만남이 시작된 거다.  


똑똑, "안녕하세요?"

낯선이가 한국말로 인사를 하자 그녀는 자동응답기처럼 외워둔 말을 했다.

"저는 중국어 선생님입니다. 한국어 몰라요."

한국어를 모른다는 그녀는 발음이 유창했다. 중국어를 못 한다는 말조차 중국어로 할 줄 모르는, 그러니까 진짜로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다짜고짜 출력해 간 시간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못한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영어도 괜찮다고 하자 그녀가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영어를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partner teacher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다. 파트너 티처라면 협력 강사를 말하는 건가? 나는 안타깝지만 당신에게는 파트너 티처가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계속해서 파트너 티처만 찾았다. 그녀는 분명히 파트너 티처가 있다고 들었다고 했고 나는 파트너 티처가 있는지 확인하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그녀는 내가 누군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을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동안 그녀가 한국말로 '담임 선생님?'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몇 학년 몇 반이냐 물었다. 내가 우리 반을 알려주자 그녀는 내가 바로 자신의 파트너 티처라며 좋아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계속 찾던 건 협력 강사가 아니라 원어민 강사 업무를 맡은 교사, 즉 나였던 거였다.


우리는 영어로도 소통이 잘 안 된다는 걸 확인하고 번역기 어플을 켰다.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의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중국어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그녀가 하는 말이 중국어와 한글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내가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내면, 스마트폰 화면에는 또 내가 하는 말이 한글과 중국어로 나타났다. 나는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번역기가 번역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녀의 표정과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우리는 소통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가 끝나고 그녀는 자신이 한국말을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나야말로 중국어를 하나도 몰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아는 중국어는 '니하오'와 '쎼쎼' 뿐이라는 말도 덧붙이며.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 처음 올 때 '안녕하세요?'와 '고맙습니다'만 외워서 왔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안녕하냐고 물을 수 있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사후세계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굿플레이스’에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사람은 영어, 한 사람은 프랑스어를 쓰지만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굿플레이스로 불리는 그 세계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언어로 말하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지만 내 귀에는 영어로 들려서 나는 상대방이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얼마 전 삼성에서 나온 새로운 스마트폰이 실시간 통역 기능을 갖췄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제 ‘굿플레이스’에 나오는 그런 장면을 현실에서도 볼 수 있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기술이 발전을 할수록 인간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아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번역기의 도움으로 일을 수월하게 해 내고 나니 다다익선, 거거익선처럼 기술은 발발익선(?)이라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 물론, 윤리적으로 옳은 방향, 장기적으로 사람과 자연에게 이로운 선에 한해서. 


번역기의 발달로 듣도 보도 못한 언어를 쓰는 오지 마을 사람들과도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내 모습도 떠올린다. 

"할머니가 젊었을 적에 한국어를 못 하는 중국인을 만난 적이 있었어. 할머니도 중국어를 못해서 난감했지 뭐야. 그래서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했단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만나서 영어를 하다니 웃기지 않니? 그땐 그랬단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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