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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Sep 17. 2021

상대성 육아 이론은 일반인에겐 조금 어렵다

새벽의육아잡담록(feat. 마시멜로 실험)

1.

육아학에는 중요한 공식이 있다.  


F=ma


F는 말 그대로 파덜이다. M은 질량, A는 애쉐이를 말하는데 애쉐이한테 질량을 곱하면 파덜이란 뜻이다. 아빠는 질량만 대책 없이 뿔어난 애쉐이임을 증명하는 고전 육아학의 위대한 공식으로, 주말에 소파에서 디비졸던 아빠가 “으어어어어.” 하고 떨어지는 모습을 본 어떤 엄마가 만들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해당 글 내용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게다가 남자에다 모솔이라는. 

이 고전 육아학의 틀을 깨부수고 파덜을 재정의한 위대한 또 하나의 공식이 있으니 사람들은 이를 상대성 육아 이론이라 부른다.


2.

나는 글케 으마으마하게 자상한 타입의 아빠는 아니다. 첫째인 하루가 부적절하게 떼를 쓴다 싶으면 하하호호 같이 놀다가도 안면을 바꾼다.

  

예를 들어 간혹 물건으로 떼쓸 때다. 내 기준, 인간은 가지고 싶다고 즉각적으로 가지면 안 되는 거라 그건 걍, 안된다. 울고, 불고, 드러눕고, 잡아 땡겨도 안된다. 안면 싹 바꾸고 ‘가지고 싶은 걸 이유 없이 바로 가질 수 없다’, 끝.


물론 하루도 이런 스타일에 적응했는지 떼쓰는 게 그리 길지 않다. 아빠는 2시간 반을 울어도 안된다는 걸 안다. 해서 좀 울다가 이제 금방 같이 하하호호한다.


이와 관련해 아내와 잡담하다가 '내가 지를 졸라 사랑하는 걸 아니 혼내도 금방 다가오는군! 하하!' 라 말했다. 아내의 답은 의외였다.


하루는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거지 실제 감정이 저렇진 않다는 게다. 하하호호로 돌아온 후의 미묘한 표정(아내는 의외로 이런 관찰에 능하다), 그 사이에 화제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는 회피성 발언 (역시나 나와 달리 이런 구라를 잘 찾는다. 전라도의 아귀가 될 상인가!)등이 그 근거다.  


3.

나의 아버지는 천진무구의 웃음을 자랑하며 자식의 문제라면 정신적, 물질적으로 올인하는 타입이다. 동시에 본인 가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쓰나미가 되어 형체를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는 특징이 있다(날아간 사람: 나).


그렇다고 물리적 체벌은 전혀 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또 이유를 친절히 설명하는 타입도 아니다. 혼난 이후에 "잘못했습니다! 아부지!" 하면 그래, 으하하, 하고 또 재미있게 지내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세속적 기준과는 조금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이질감이 덜하다. 화를 내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건 가치관이 다르다는 뜻이니까. 좀 더 정밀히 하면 ‘익숙해진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특히 가치관이 독특한 사람의 감정도 우리와 다를 바 없으며 접근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일찍 알게 된다.


왜?


딱히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에 내가 그 가치관에 대해 탐구 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식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여정에 있나니 이 과정을 거치는 자, 위의 이점을 얻는다.  


여튼 나의 아버지는 제대로 웃고 제대로 화내는 사람으로, 이것이 자식으로서 본 그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4.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이 있다. 모든 인간은 상대적이다. 저 사람에게 좋은 인간이 내겐 나쁜 인간이며 내게 매력적인 인간이 너에겐 글치 않다. 좋은 퍼즐 조각, 나쁜 퍼즐 조각이 없듯, 그냥 다른 퍼즐 조각이다.


나는 우연히 평시엔 으하하하 하다 이따금 쓰나미가 되는 아버지를 만났고, 그 쓰나미에 대해 '어라. 아부지는 어떤 경우에 화를 낼까. 일관적인 느낌이니 뭔가 법칙이 있을 것 같은데'를, 마치 도전자의 자세로 문제를 풀듯, 곰곰이 생각하는 타입으로(물론 그렇다고 얻은 게 다 정답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아버지가 필시 더했겠지만)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허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건 기질과 환경의 묘한 만남, 그러니까 우연의 결과다.  


아버지는 나에겐 상위 1%의 매력적 인간이며 좋은 부모다. 다만 다른 자식이었다면 '아,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구나'라고 생각게 할 수도 있고 '내게 이렇게 크게 화를 내니 난 가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게 할 수 있을 확률 역시 존재한다. 그 역도 성립한다.


즉, 아버지의 성격과 육아 방식은 나의 기질과 맞아 긍정적 요소로 작동했을 뿐이다. 이는 세상에 오직 하나의 부모만 겪은, 마침 그 부모가 내게 좋은, 너무나 익숙하기에 따로 생각하지 않으면 알기 힘든 종류의 무엇이었던 게다.


그럼 기질만 문제인가. 아니다, 환경도 있다.


5.

아버지가 화를 낼 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가 항시 함께 있었기에 비를 피할 동굴이 여럿 존재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위로를 받고 혼자이고플 땐 혼자 있으면 되는 꽃놀이패를 쥔 셈이다. 즉 아버지의 화는 무섭지만 내겐 이 감정을 충분히 받아내고 만회할 요소가 항. 상. 존재했다.  


헌데 아내의 관찰에 따르면 하루는 나처럼 생각을 끊는(좀 더 정밀히 하면 생각을 끊었다가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으며, 나는 나와 같은 식으로 탐구정신을 발현할 거라 생각했지만 실은 때때로 감정을 숨기는 식으로 발현하고 있던 게다.


나로서는 아버지의 장점인 일관적인 규칙 철저를 행하는 동시에, 단점인 폭발적 쓰나미를 조금 줄였기에, 즉, 좀 더 다정한 방식으로 행하고 있었기에 나의 자식은 나보다 더 빨리 인간의 내면 규칙을 빨리 캐취 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더하여 내게는 형제가 없지만 이 녀석은 있다. 하루의 입장에서 아빠는 화를 내고 엄마가 하나(둘째)를 돌보고 있으면 숨을 동굴이 없다.  


즉, 고립이다.   


6.

내가 흔히 고립된 인간에 대해 저지른 내면의 실수는(내면의 실수라 한 이유는 세상에 그 생각을 한 걸 나만 알고 있으므로), 누군가를 통제력 부족한 인간이라 단정했던 것이다. 아니, 스트레스받았다고 뭘 저렇게 다 티를 내고 말하나, 스스로 침잠해 이겨내야지, 하고 말이다(내가 틀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발현과 다양한 자가 치유 방식이 있다).


잘 알려진 마시멜로 실험의 실수처럼 우리는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조급한 행동을 하면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판단 내리기 십상이다. 마치 마시멜로를 안 먹고 참은 아이가 선천적으로 통제력이 뛰어나며 성공할 기질이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실험도 틀렸고 내 생각도 틀렸다.


인간의 통제력이나 절제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찐이 개찐이다. 군대처럼 한정된 공간에 인간을 가둬두면 대개 비슷한 일탈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거짓말처럼 비슷한 류의 사람과 비슷한 행동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나타난다.


그럼 그 인간들은 모두 통제력, 절제력이 부족한 걸까. 가장 큰 요소는 보편적 인간이 통제력이나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에 놓여 있는가다.


특별히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누구도 모래밭에서 평소 페이스로 달릴 수 없으니 말이다.


7.

나는 적절히 생각을 끊었다가 안정을 찾고 다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에 우연히 있었을 뿐인데(경험상 이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자란 외동의 큰 이점이라 생각한다), 그 우연 덕에 얻은 환경의 바탕 위에서 한 생각들을 인간의 보편성, 자식의 보편성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결론 내렸다. 그렇군, 자식이란 이렇게 충돌하며 고민하고 성장해나가는군, 하고 말이다. 사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개인의 기질에 따라 상대적이며, 다른 환경이라면 다른 방식이 필요한데 말이다.


시간조차 어디에서 흐르는가(앤트맨의 미시세계를 참고하자!), 어떤 질량에서 흐르는가(인터스텔라의 급노화를 참고하자!)에 따라 달라지듯, 부모도 어떤 자식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기질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역도 성립한다(그러니까 부모탓은 적당히!).


절대로 긍정적인 요소와 절대로 부정적인 요소 따위는 마치 절대시간이 없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상대적으로 달리 작용할 뿐이다. 헌데 나는 왜 그걸 뉴턴 시대의 절대시간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익숙했던 것인가. 


네은장.


8.

육아는 끝없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이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자꾸 녀석에게 주려한다. 사실은 이 녀석에게 좋은 걸 줘야 하는데, 그 좋은 게 뭔지 끊임없이 묻는 과정인데.


F=ma의 고전 육아학에선 벗어난 듯했지만 상대성 육아 이론은 나를 나로서가 아닌, 타인을 타인 관점에서, 자식을 자식 관점에서 생각하는 우주적 상상력이 필요하기에 자꾸 함정에 빠진다.


아놔. 나도 아직 앤데 되게 어렵네.


그렇게 오늘도 오늘의 육아가 저문다.


추신: 글고보니 아인슈타인 댑따 무책임한 아빠였는데 아빠로서는 내가 더 위대한 것으로 오늘의 정신적 승리를 자축해봅니다.


룰루랄라~


아인슈타인. 의문의 1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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