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육아잡담록
1.
중학교 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네메이아 사자 마! 여기가 으데라고 기 들어오노!(사실은 본인이 기 들어감) 마! 니 좀 치나!(하고 뚜벅뚜벅 걸어가 찢어 버린다), 헤라클레스 살아있네!!’
라는 느낌이었다(이것이 붓싼 중딩의 신화 읽기입니다).
글타. 간지도 이런 간지가 없다. 여기서도 찢고 저기서도 찢고 심지어 저승 가서도 찢는다.
2.
우연히 서양 고전학자 김헌 샘 강의를 듣다 보니, 아... 신들이 냅다 간지만으로 찢고 다니는 건 아니구나… 증조부가 아빠로 위장(?)해 엄마를 임신시켰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저, 저, 저런 호로 자…! 로 볼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이상향과 권력을 우째 분배하는지에 대한 은유구나(그 전까지 신화에 있는 내용 곧이곧대로 보고 욕하는 타입이었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거슨 붓싼 중딩의 신화 읽기입니다), 해서 다행히 이제 그리 큰 충격은 아니다.
헌데 사람이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다르다고 아빠가 되니 헤라클레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생각이 간다. 그전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어린 시절의 헤클이를 내 멋대로 상상하며 으마으마하게 불쌍히 여기는 거다(양육권은 어쩌지, 막 그러고).
흔한 말로 어릴 때는 둘리 편이다가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다는데, 아빠가 되니 위대한 12 과업보다 우리 헤클이가 어린 시절, 홀로 품었을 마음의 상처를 상상하게 된다. 친부는 튀었지, 양모는 독사 풀지… 이런 애가 한 둘도 아니니 신생아 및 아동 인권이 아주 그냥 암담하다.
‘아이고. 으린 눔이 울메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꼬… 그래서 니가 어릴 때 샘도 패 죽이고(으응?!) 가족도 패 죽…(어, 그러고 보니 이건 좀…)… 여튼 아가 완전 맛이 가뿠네, 아이고’
하고 말이다.
3.
세계의 쌈박질에 대한 근본 원인에 영국을 찍으면 대충 정답이듯,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애들이 고통받을 때 대충 제우스를 찍으면 정답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음따.
‘마! 아빠믄 최소한은 하라고. 최소한은!’
모르긴 몰라도 제우스가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탄생(?)해 다행이지, 붓싼 영도 다리 밑에서 태어났으면
‘처자식이 밥도 못 묵고 빌빌대는데 점마는 또 어데 가서 완장질 할라꼬 저 난리를 치고 앉아 있노...’
하고 티타노마키아 시작도 전에 크로노스 이하 동네 아재들에게 털렸을 거다.
참고로 가부장삘이 강한 동네(예: 과거의 부산)는
‘뻘짓은 해도 가족은 굶기지 않는다’
‘내는 빌어 먹어도 우리 애는 으디서 기 죽으믄 안 된다'
가 국롤이라 이걸 못하면 동네에서 양아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여하튼 제우스는 붓싼 영도 다리 밑에서 안 태어난 걸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4.
일주일 전의 일이다. 하루가 우연히 집에 있는 체스판에 흥미를 두는 김에 가르쳐 주었다. 대충 우째 놓고 우째 움직이는지 알게 된 게다.
둘째 날엔 대충 놓는 법을 다 외우길래,
‘오오, 재능 있나?, 있는 거야?, 유 아 마이 싼(?)샤인(?!)’
하고 앱을 다운받아 휴대폰으로 체스 두는 걸 보여주었더니 무척 좋아한다. 여기서 실수를 하나 하게 되는데 '승진'을 보여준 게다(혹시나 안 두시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제일 쪼랩인 폰을 체스판 끝까지 보내면 제일 강한 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체스를 두는 것보다 본인이 흑백을 모두 잡고 백색의 폰으로 끝까지 가, 퀸으로 승진하는데 빠졌다. 재미 삼아 폰 6개를 퀸으로 바꿔주니 마치 바나나 300개를 받은 아기 원숭이마냥 꺄악꺄악 대며 흥분한다.
5.
문제는 체스를 같이 하고 싶은데 그때부터 폰의 승진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퇴근 후, 삼일째까진 재밌다가 사일째 되는 날, 속에서 열불이 난다(레알).
지가 무슨 해군 출신도 아니면서 뭐만 하면 ‘길 비켜!’ 다(해군은 배의 복도가 좁기에, 상급자가 지나갈 때 벽에 찰싸닥 달라붙는 문화가 있습니다). 즉, 지 폰을 못 먹게 한다. 체스고 나발이고 일단 승진해서 퀸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세돌은 신이 와도 석점 깔면 지지 않는다 했지만 체스에선 퀸 6개를 깔면 올림푸스 신들 다 모은 다음에 알파고랑 카스파로프랑 이세돌이랑 푸틴이랑 F-16 5기가 동시 출격해도 못 이긴다.
내 자식이지만 체스 진짜 드럽게 둔다.
6.
제우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집념은 대단하다. 혼인빙자 간음과 임신...(보통 시키기만 하는데 가끔 어쩔 수 없이 본인도 함. 어 그러고 보니 임신의 새 역사를 쓰신 분이네)이 주특기인 그는 이런 능력을 십분 활용해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 재비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이고, 마포대교가 안 무너진 상태에서 현재까지도 짱을 먹고 있다.
하루는 퀸이 강하다고 하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퀸을 늘리는데 집중한다. 오롯이 퀸, 일직선 퀸이라 현재, 아버지의 폰들을 다 제끼고 잠자리에도 흑백의 퀸과 함께 한다(… 어… 어감이 윤리적으로 이상한데 어디까지나 기물 이름이고 하루는 만 4살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과 힘에 대한 집착을 바보 같다 생각한 나는?
이왕 체스를 배웠으면, 빨리 규칙대로 둬서 발전해야 한다는 망상에 잡혔다. 망상에 잡힌 이유는 불과 이틀만에 체스 놓는 법을 외워버리니 은근 기대가 생긴 게다.
즉, 이렇게 빨리 규칙을 외울 정도면, 혹시 '그랜드 마스터 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작용한 셈이다. 태어난 지 4년, 체스를 배운 지 3일밖에 안 된 녀석을 두고 말이다.
사소한 일이지만 자식에게 시답잖은 욕망을 투영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얘가 3일 만에 체스를 잘 둘 거면 분명 내 아들이 아닌 게 분명한데(응?!) 말이다.
평소 시답잖은 욕심을 부리는 부모를 비웃었는데 내가 그러고 앉았다.
7.
하루에게 체스 놓는 법을 가르치면서 나불댔다.
‘규칙은 금방 외울 필요 없어. 일단 즐기는 게 중요해.’
‘폰은 되게 약하고 자유도 없는데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 가장 강한 퀸이 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걸음씩만 가면 돼.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와.’
그리고... 아빠는 불과 사일째에 천천히 대신, 빨리빨리를 외치며 말한다…
‘체스는 중앙을 지배해야지!’
‘폰은 죽어도 돼! 비숍이 치고 나갈 자리가 있어야지!’
8.
그리스 로마 신화는 꼬꼬마 시절엔 간지 그 자체였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드니 당대의 역사와 정치, 가치관을 영원에 남긴 인간 지혜가 있다.
오늘, 아빠가 되어 보니 나의 사소함, 비루함, 찌질함이 여기 있다. 사소한 체스판 앞에서조차 이렇게 욕망을 투영해대는데 앞으로의 나는 얼마나 너저분할 짓을 하게 될는지.
어릴 때는 그리스 로마의 신들처럼 강해질 것만 같은 느낌에 흥분했다면, 지금은 저 신들이 나처럼 멍청하고 바보 같고 집착하고 욕망하고 무엇보다 어설픈 부모라는데 위로받는다.
모르긴 몰라도 그리스 로마 신들도 체스는 더럽게 두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