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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Apr 21. 2022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와 남의 아이는 어떻게 예뻐지는가

새벽의육아잡담록

1.

박동훈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보았다.

이 영화는 공부 좀 한다는 애들만 간다는 기숙사형 자사고에서, 집안 사정이 영 좋지 않은 데다 수학 9등급을 받아 전학 갈 위기에 놓인 학생이, 우연한 기회에 북한 수학자 출신 경비원과 만나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친해지는 이야기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 좀 더 와닿기도 하는데(일단 수학 9등급? 으응?!?) 남는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2.

“최고의 수학자로 존경받는 그 리만 동지가 어째서 이 1.41421356 쩜쩜쩜 뭐 그런 한심한 계산을 했냐는 거야.”


“그니까요.”


“친해질려고 그러는 거야.”


“룻트 2랑요?”


“그냥 공식 한 줄 딸랑 외워서 풀어버리면 절때 친해질 수가 없는 기야. 살을 부대끼면서 친해져야 이해가 되고, 이해를 하면 사랑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고 일일이 다 계산을 해요?”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 공들여서 천천히, 아주 꼼꼼하게 생각을 하는 거이지. 그래… 좀… 뭐 친해졌내?”


“뭐… 좀… 근데 답이 뭐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내. 니가 낸 답이야. 니가 확인을 해야지 누가 확인을 하내.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그게 맞는지 확인을 하고 증명을 하는 게 수학자가 하는 일이야.”


3.

무려 리만을 동지라 부르는 쾌감은 뒤로하고(다른 체제 하에서 발전한 언어의 쓰임과 어감은 언제나 재미가 좋다) 두 가지가 좋다. 하나의 관점은 이렇다. 


나는 한 생각이 있으면 오랫동안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어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른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속에 생기면 스스로 납득되는 문장의 요약본을 얻을 때까지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오호! 그래 이거지!’ 


하고 홀로 누리는 쾌락은 삶의 최상급 기쁨 중 하나인데 문제는 반드시 공허함이 찾아온다는 게다. 


이런 생각을 나만 했을 리 없기에 인류 전체 역사에서 괴물 같은 천재와 괴짜들이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답을 낸 과정과 결론을 문장으로 접하면, 일단 과정이 치밀하고, 결과물이 정갈하여 아름다우며, 때때로 비슷하긴 하지만 누가 봐도 까마득한 상위 호환 버전이라 그렇다. 


이쯤 되면 나는 왜 그렇게 집착했나. 그냥 이 사람 책을 먼저 봤으면 될 걸, 하는 기분이 온다.


헌데 그렇게 해서 무수한 천재와 괴짜들의 생각만 섭취한다고 내가 그렇게 기쁘고 행복한가, 하면 이게 또 그렇지가 않다.


아주 아주 비효율적이지만 스스로 하니, 그 과정이 기쁜 게다. 결국 이 과정은 나를 나와 더 친하게 만든다. 


해서 저 구절이 마치 내 삶을 위로하는 듯해 좋았다. 


4.

또 하나의 관점은 육아다. 거창할 건 없고 내 내밀한 육아의 목적은 이거다. 


‘자식이랑 좀 더 친해지고 싶다.’ 


육아에 관한 큰 틀은 오은영 박사님의 방송이 정말로,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 으레 쭉정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육아 관련 책을 무진장 읽는데, 과연 내공이 십 갑자쯤 되는 사람이,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씩씩하게 무찔러나가는 과정과 결론을 모두 볼 수 있는 방송은 책 보다 크게 온다. 이야! 저 행동을 이 관점으로 바라보네! 하고 말이다. 오은영 박사는 정말로 육아에서 끝판왕이란 생각이 든다. 


헌데 다행히, 육아의 세계야말로 디테일로 들어가면 개별성 끝판왕이다. 오은영 박사의 방송만 본다고 끝날만큼 이쪽 세계는 만만치 않고(오은영 박사는 훌륭하지만, 알다시피 방송은 편집이 존재하고 핵심만 보여주며 무엇보다 이후에 아이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린 인간은 좁고 얕은 만큼이나 넓고도 깊어 부모 되는 자라면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기쁨과 슬픔이 존재한다.


사소하게 상처 주고, 사소하게 상처 입으며, 사소하게 웃고, 사소하게 화내고, 사소하게 사랑하고, 사소하게 즐겁고, 사소하게 슬픈, 그 길고도 긴, 그 비효율적이고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나는 자식과 친해진다.  


5.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별다른 철학 없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입학, 2년을 다녔다(아쉽게도 현재는 폐원했다). 아마도 일반적인 남자 혹은 아빠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예쁜다는 것은 물론, 특히 남의 아이가 예쁘다는 감정은 이전에 거의 느껴본 적이 없다. 


헌데 공동육아란 걸 하면, 아마도 일반 어린이집보다 아빠가 그곳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대략 100배 정도 많은 데다(일도 겁나 많다…!), 무엇보다 '의무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을 가고 나면 특히, 아빠는 바뀐다.


나로선 극적인 경험인데 내 아이가 아닌데 남의 아이가 예뻐진다. 남의 아이가 예쁘니 남의 아이가 소중하다. 


살을 맞대고, 밥을 먹이고, 화장실을 데려가고, 서로 삐지고, 서로 화내며, 시간을 보내니, 나와 관련 없는 아이가 인생으로 들어온다.


해서, 지금의 나는 자식 외에도 예쁜 아이가 많다. 놀랍게도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아이가 예쁜 사람으로 변해 있다(모두가 그렇지 않은 이유는, 나 많이 때리면 나도 싫다는...). 친해진 아이와 만나는 날엔 무엇을 하고 놀까 생각한다. 이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해서 난 저 말이 그렇게 와닿았다. 

“그냥 공식 한 줄 딸랑 외워서 풀어버리면 절때 친해질 수가 없는 기야. 살을 부대끼면서 친해져야 이해가 되고, 이해를 하면 사랑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고 일일이 다 계산을 해요?"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 공들여서 천천히, 아주 꼼꼼하게 생각을 하는 거이지. 그래… 좀… 뭐 친해졌내?”


6.

폐원했지만 서로 친해졌기에 이따금 어린이집 멤버들과 만난다. 어제도 그랬다. 내가 눈에 보이자 아이들이


“돌고래에에에에에”


“돌고래에에에에에에에다” 


하고 소리친다.


아이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있어도 없어도 좋을 동네 아저씨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꽃이 된다.


친해진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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