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육아잡담록
1.
하루는 여자 아이들한테 인기가 좋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까지, 반을 옮겨 다닐 때마다 창밖을 보며 기다리거나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여자아이가 항상 있다.
나 역시 반을 옮겨 다닐 때마다 창밖을 보며 한대라도 더 때리려고 기다리는 여자아이들이 있었기에 공감된다(…).
2.
아내 왈, 한 번은 하원 후 근처 키즈까페에 갔다고 한다. 한 할머니가 손녀 이야기를 꺼낸다. 유치원에서 매일 자기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아이가 있어 귀찮아 죽겠다고. 근데… 이름이 하루다…?!?
아내는 깜똭, 해선 본인이 하루 엄마라고 밝혔다. 그때다. 어떤 여자아이가 마치 하루의 여친이라도 되는 양 팔짱을 끼고는 계속 달라붙어 있었다.
하루는 세상 관심 없는 듯, 꼭 붙어 있는 여자아이를 뿌리치고 다른 친구와 놀기를 반복한다. 여자아이는 하루를 백허그하거나 졸졸 쫓아다닌다. 할머니가 말한다.
“어? 쟤가 우리 손년데?”
실제론 매일 그 여자아이가 하루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이 반전에 할머니와 아내는 빵 터졌다. 하루가 엄마에게 다가오자 옆의 할머니가
“우리 손녀가 쫓아다닐만하네!” 하고 웃었다고 한다.
3.
몇 년간 아이를 키워보니 아무래도 유아기에는 모든 면에서 여자 쪽의 발달이 빠르다(그 외에 청소년기, 중년기, 노년기가 그렇다). 남녀 간의 감정에도 일찍 눈을 뜬다. 물론 하루는 아직 그런 감정을 알지 못한다.
어쨌든 자식이 인기가 좋다니 기분 나쁠 리 없다.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생산품(으응?!)을 내놓은, 올해의 소비자만족도 1위 제품의 CEO가 된 기분이랄까.
내 자식 하버드 유치원! 내 자식 스와힐리어 가능! 같은 건 구차하게 자랑할 타이밍을 노려야 하지만 인기가 있다면, 더구나 잘생겨서 그랬다면 말이 필요 없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라거나 마! 내가 인마 내가 니 고조 할배뻘이다, 같은 구질구질한 서사가 필요 없다, 이 말이다.
4.
여하튼 이런 식으로 하루의 인기를 증명하는 몇 번의 사건, 사고를 거쳐 유치원 선생님은 물론, 같은 반 엄마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하루의 아빠, 즉, 내게로 옮겨왔다.
하루는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대충 얼굴에 균형감이 있는 데다 또래 남자들에 비해 성정이 부드럽다. 그러니 하루의 아빠는 뭔가 부드러운 성격에 훈남일 거라는 기대감이, 나도 모르는 사이, 유치원 곳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던 게다.
아내에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해서, 하루의 유치원 행사에 단독 출연(참석이지만)하기로 결단을 내린다(참고로 유치원 초창기의 이야기입니다).
5.
나로선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별명이 고자 따위가 되어버린 탓에(아무 이유 없이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한 번 찍히면 6학년까지 가는 초등 같은 분위기의 회사인데 아직 다니고 있다…! 현재는 권력자가 되어버려 무소불위의 단맛을 알아버린 탓에 그만둘 수 없다…! 권력 최고…!) 없잖아 억울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이야말로 나의 싸나이다운 외모를 증명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나이 중의 사나이류 인간(=나)은 본투비 자신감이 어마어마해서 타인이 본다고 해서 옷차림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패션은 타고난 외모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고자(…?!?) 같은 몰골로 결연하게 유치원 행사에 참여했다(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 고자가 계시면 죄송합니다. 상처 입은 고자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길).
6.
옷차림으로 제법 놀림받은 나지만 행색이 내추럴하면 얻는 장점이 있다.
“저 사람의 상그지 같은 내추럴함으로 보아 분명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심리란 게 묘해서 되려 극단적인 패션감각은 인간의 놀라운 능력인 상상력을 극한까지 자극한다.
마치 꾸미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샘솟게 하는 쓰리쿠션 전술…!! 안경을 벗으면 초미남이 된다(…?!?), 같은 만화적 설정이 현실에서 폭발한다…! 죽을 때까지 안경만 안 벗으면 된다…!(…?!?)
그렇게 결연히 하루의 첫 유치원 행사에 다녀왔다.
내가 마! 인기남 하루 아빠다 마!
7.
아내는 유치원의 운영위원회이기도 하다. 해서 후속보도를 빨리 접할 수 있었다. 과연, 음지의 슈퍼스타였던 내가 다녀간 후, 선생님과 엄마들이 모두 수군댔다고 한다…!
내가 엉…! 딱 이랄 줄 아라따…! 맨날 나보고 스님룩이라느니!!? 자연인이라느니..!? 고자라느니…! 엉…!
하루 정도 나이대의 아이를 키우는 유부녀는 보통 인생의 단맛, 쓴맛을 풍부하게 맛보고 이쯤 되면 좋은 남자를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고 착각해 결혼했지만, 결국 남편이라는 최종 빌런을 만난다. 이후에야 아 내가 잘못했구나, 그르지 말 걸, 하고 진정한 쏴나이를 보는 눈이 생기는 법.
그런 전장의 베테랑이라 불리우는 유부녀들이 인정하는 쾌남. 그야말로 진정한 쏴나이 중의 쏴나이로 오피셜 하게 인정받을 때가 왔다, 이 말이다. 아내는 남편 단속을 잘해야 할 것이다…!!! 판타스틱쿠! 고르자스!
그리고 아내는 엄마들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
"… … 하루는 엄마 닮았네...!"
"… … 하루가 엄마 닮았어...!!"
"… … 하루는 엄마네....!!"
“… … 아빠가 나이가 많은가봐…!(아내가 연상이다)”
“… … 하루 아빠는 백수… 아니, 집에서 글 쓰는 사람인가 봐…!(직장인 몰골이 아니야…)“
… …
“… 하루 아빠가 사람은 참 착해(한 할머니 의견)”
… …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추신 : 영상은 걍 하루와 하나가 체스 두며 노는 모습. 이젠 둘이 꽤 잘 놀아 손이 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