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프러포즈받으면 더 잘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번 제주 여행에선 스냅사진을 찍기로 했다. 워낙 기념사진을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조르길래 처음엔 심드렁하며 오케이 했는데 점점 날이 다가오자 내가 더 레퍼런스를 열심히 찾아보게 되었다. 촬영 날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오빠는 하얀 티에 슬랙스를 입기로 했다. 너무 웨딩스런 느낌이 싫어, 코를 맞대거나 이마를 맞대는 포즈는 피해달라고 작가님께 사전 주문도 해두었다.
3박 4일 여행 중에 둘째 날 촬영이라 첫째 날 팩도 하고 잠도 푹 잤다. 늦은 5시에 작가님을 만났다. 오름에서 찍고 싶다 했더니 작가님이 잘 아는 스팟으로 데려다주셨다. 한 가지 스팟에서만 찍는 건데 감사하게도 가까운 세 가지 스팟에서 찍어주셨다. 첫 번째는 나무가 우거진 길, 두 번째는 푸르른 풀이 가득 찬 오름, 세 번째는 나 홀로 나무가 있는 넓은 오름.
세 번째 장소인 나 홀로 나무 앞은 생각보다 너무 예뻤다. 명소는 명소인지라 다른 커플의 웨딩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가님이 예쁜 하얀색 천과 레이스, 그리고 피크닉 바구니를 소품을 챙겨주셔서 소풍 나온 느낌으로 재밌게 촬영을 했다.
마지막으로 나 홀로 나무 앞에서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빠지길 기다렸다. 작가님이 갑자기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더니 음악이 있어야 사진이 잘 나온다며 음악을 틀어주셨다. 비긴 어게인 OST가 잔잔하게 깔렸다. 편하게 앉아서 음악을 듣다가, 작가님이 일어나세요,라고 하셔서 일어났는데 오빠는 일어나지 않고 피크닉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빠는 작은 보라색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예쁜 목걸이가 담겨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 내가 프러포즈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오빠는 상자와 함께 들고 있던 카드를 펼쳐 그 안에 담긴 글귀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초희야 놀랐지? 초희에게 어떻게 프러포즈해야, 초희가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 초희와 두 번째 함께 오는 이 제주에서, 초희와 함께 고른 이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에서 프러포즈를 꼭 하고 싶었어. 또 이 행복한 순간을 초희가 영원히 간직했으면 좋겠어서 스냅사진의 마지막 한 컷은 이 모습으로 찍고 싶었어. 처음 초희를 만났던 구월동 횡단보도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초희를 사랑해! 초희야 나랑 결혼해줄래? 너 나랑 결혼할 거지?
나는 너무 놀라서 정말 가만히 서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읽는 오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편지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니 그 모습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고 미안해서 목이 메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카페에서 우리가 결혼하는 게 맞을지,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지, 이런 이상한 소리를 꺼냈는데.. 오빠는 날 위해 여행 전부터 이 순간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준비했다는 생각을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머리가 멍해서 단번에 대답도 못하고, 기뻐 죽겠다는 내색도 못하고, 너무 당황해서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저 얼어붙은 채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사진작가님은 저 멀리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계셨다. 날이 참 좋은 날, 아름다운 초록빛 오름에서, 감미로웠지만 그 순간엔 귀에 들리지 않았던 음악을 배경으로, 사진 포즈를 핑계로 포옹을 하고 입을 맞췄다.
사진작가님과 인사를 하고 오빠는 준비했던 긴 편지를 주었다. 아까 그 카드는 축약본이고 이 편지가 진짜라나. 그 편지를 읽자마자 눈물이 났다. 오빠는 옆에서 왜 아깐 안 울고 지금 우냐며 농담을 했지만, 갑자기 오빠와 단 둘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편지지 두 장을 빼곡하게 채운 글씨가 너무 예뻤고, 나를 안아주는 오빠 품이 따뜻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프러포즈를 준비했던 오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미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맞춘 후라, 오빠는 프러포즈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런 얘기하기 전에 프러포즈를 했어야 한다고 했단다. 프러포즈는 결혼 전에 다 알고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때 묻은 나에겐 너무 서프라이즈 한 프러포즈였지만.
오빠는 반지를 선물할까 하다가 분명 까다로울 날 생각해서 다음에 함께 고르기로 하고, 깔끔하고 심플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골랐다. 여행 오는 내내 혹여나 내가 캐리어를 뒤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들키지 않으려고 검정 봉투에 담아뒀다. 촬영 땐 작가님이 센스 있게 피크닉 바구니에 넣으라고 나 몰래 신호를 주셨단다. 화장품 색도 구분 못하고, 귀걸이도 구분 못하고, 향수도 구분 못하는 둔한 남자가 어쩜 그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목걸이를 골랐는지!
오빠의 프러포즈 선물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맥북이다. 로맨틱이란 1도 없는 나는 평소에 우스갯소리로, 오빠 나는 프러포즈로 맥북!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차피 결혼해서 같이 쓸 맥북, 프러포즈로 생색내란 뜻이었는데 오빠가 정말로 맥북을 사주기로 했다. 그런데 맥북을 주는 모양새가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단다. 목걸이와 함께 맥북을 주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맥북은 공항에서 걸릴 것 같고, 또 내가 원하는 맥북 스펙이 있을 것 같아 함부로 사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맥북은 제주 여행할 때 같이 보러 가는 걸로 정했단다. (그런데 내가 여행 때 맥북 고르는 게 시간이 아까워 나중에 서울에서 고르기로 했다) 그런 말을 한 나도 너무 웃기고, 그렇다고 또 이런 고민을 한 오빠도 너무 귀여워서 엄청 웃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너무 과하지 않고 담백한 연출과, 나에게 어울리는 목걸이에, 내가 원하는 선물에, 결혼하자라는 말의 무게감을 아는 나의 남자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게 꼭 맞는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싶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해준 잊지 못할 프러포즈였다.
둘 다 프러포즈는 인생 처음이라, 하는 것도 서투르고 받는 것도 서툴렀다. 나보다 더 긴장해서 눈물이 맺히고 손이 바들바들 떨리던 오빠 모습을 여행 내내 놀리기 바빴지만, 사실 그 모습이 너무 고맙고 소중해서 계속 떠올려본다. 우리가 어떻게 찍혔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나간 순간들.
오빠 근데 있잖아, 나 다시 프러포즈받으면 더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기뻐하고 막 눈물도 흘리고 꼭 껴안아줄 수 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