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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람들을 기꺼이 빌려 쓰는 용기

04. 힘들 땐 용기 있게 기대기

by 김초희

얼마 전, 황선우 작가의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읽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 꼭꼭 씹어먹은 문장이 있었다.

"이제 나는 아프고 힘들 때 친구들에게 구조 요청을 곧잘 한다. 혼자 해결하는 편이 간단할지라도 옆에 있어달라고 말할 줄 안다. 상대방이 뭔가 준다고 하면 고맙게 받는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나 역시 기쁘게 이용당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도 약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며 약함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도움을 받아 해결을 모색하고, 친절에 기대어 회복하고, 다른 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잘 돌려줄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만드는 것. 내가 알게 된 진짜 강함이란 고립이 아닌 연결의 힘이다."

읽자마자 이 이야기가 내 마음을 땅! 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구조 요청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거든.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립심이 강한 아이였다. 부모님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해내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도 제법 스스로 잘했고,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마련하는 것도 알아서 했다. 휴학을 결정하고 인턴과 제주살이를 했던 것도, 첫 독립 후 집을 마련하는 것에서도 엄마 아빠와 큰 상의 없이 '나 이렇게 결정했어!'식으로 통보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제멋대로인 딸이었는데 그만큼 부모님이 믿어주셨던 것 같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남자친구랍시고 나한테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응원해 주는 조력자 같은 사람과 연애를 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변에 얘기를 할지언정 도움을 요청하는 편은 적었던 것 같다. 내 성향 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 말하기가 귀찮다. 말 그대로 귀찮다. 무엇이 힘든지, 왜 힘든지를 설명하는 과정 자체가 번거로웠다. AI가 그간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상대방한테 자동으로 공유해 주면 모를까. 조언과 위로를 받기 위해 내 이야기를 쭈욱 나열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둘째.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내 고민을 털어두면 뭐가 달라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웃고 떠들기에도 바쁜데, 내 안 좋은 이야기만 늘어두면 우리의 시간이 불만 덩어리가 될까 봐 그게 싫었다. 셋째. 나만 힘든 거 아니잖아. 나한테는 내 힘듦이 가장 크지만, 사실 저마다 힘든 게 있는데 굳이 내가 거기에다가 나 힘들어-하고 찡찡거리기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도 주변에 도와줘! 하고 SOS를 청하지 못했다.



그런데 30대의 인생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회사도, 인간관계도, 돈도, 자아도 20대보다 곱절은 힘든 것 같다. 20대 때는 뚝딱뚝딱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30대의 고민은 혼자 해결하기에 너무 벅찼다.


저 책의 문장을 읽고 나는 친구들과 약속을 주르륵 잡았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있는 힘껏 토로했다. 나 너무 힘들어 얘들아. 나 진짜 너무 아파!라고.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에게 힘을 줬다.


- 초희 씨 보고 주변에서 좋은 에너지 받고 더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초희 씨처럼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어요.

- 초희야. 항상 느꼈던 건데 난 너랑 얘기하다 보면 초희는 진짜 열심히 사는구나 하면서 항상 나를 반성하면서 네가 너무 존경스러웠어. 지금의 너도 충분히 멋있고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과거의 미래가 아닌 지금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아예 고민하는 날을 정해 보면 어때? 그날만 고민하고 나머지 날은 고민하지 않기! 아예 제한을 주는 거야.

- 초희님 제 워너비예요.

- 네가 열심히 사는 것도 난 너무 좋아 보이는데,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으니까 조금만 힘을 빼보자. 우리 둘 다 멋지다!

- 우리 둘 다 상반기에 힘들었네. 진짜 하반기에 얼마나 잘 되려고 그러지?

- 그건 우리가 우리여서 그래. 그냥 우리는 그런 기질의 사람인 거야. 설령 우리가 그 사람들처럼 살면 살아질까? 아닐 거야.



정말 값진 조언도 얻었고, 위로도 받고, 검증도 받았다. 내 옆에 이렇게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내가 기꺼이 그들의 마음을 빌려 쓸 때, 나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무 오만했구나. 강한 척 혼자 버텨왔지만, 사실 약함을 기꺼이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건지 몰랐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이미 언제든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써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다.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참 기뻤다. 고맙고 따뜻했다.


30대에는 내 주변 사람들을 기꺼이 '써먹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 곁에 남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렇게 하더라도 충분히 쓰여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기대고자 할 땐 나 역시 기꺼이 쓰일 준비를 해두고 싶다. 그게 결국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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