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한 월급만큼, 딱 그만큼 받는 대우를 참아내면서 내 자신의 내면을 다듬고 깎는 것은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한편, 당장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는데 바로 눈앞에 닥쳐온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관한 고민은 별개의 문제였다. 어려운 민원을 처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해할 수 없는 근무성적평정 결과라든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업무분장표라든지 하는 것들이 쌓여서 도저히 참기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일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처음에는 옛날 세대의 공무원들이나 직장인들이 그러했듯, 묵묵히 참고 견뎌보기도 했다. 하지만 참고 견뎌봤자 내 속만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내 속에서는 큰 불이 나 모든 것이 타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아무도 내 속을 몰랐다. 처음 일했던 부서에서 전화 벨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지경에 이르러서야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큰 용기를 내서 팀장에게 조심스럽게 나의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었는데, 그때 팀장은 내가 뱉어 낸 말들이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듯 매우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 정말? 나는 김촉씨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내길래 괜찮아서 잘하고 있는 줄 알았지. 너무 잘해서 적성에 맞는 줄 알았네.”
당시 팀장은 나름대로 위로해주려고 한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조직에서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묵묵히 참고 견디고 있으면 누구라도 나의 힘듦이나 고단함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초코파이뿐이었다. 거대하고 굳건한 조직이라는 큰 숲은 홀씨 같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전화 벨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리기까지 하루에 몇 통의 전화를 받으며 민원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매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리 팀의 팀장조차 몰랐다. 나는 첫 부서에서 전화 벨소리 환청을 거치면서 회사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조직이 얼마나 굳건하고 보수적인 집단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충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3년 차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담당 팀장에게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업무를 팀장과 상의해서 처리했다. 지방직 팀장들의 경우 짧게는 15년, 길게는 25년 가까이 근무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담당 팀장이 나보다 업무에 대해 훨씬 많이 경험한 상태였다. 조직 분위기에 쫄아 처음부터 바로 팀장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고민을 많이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3년 차쯤 되었을 때에도 팀장에게 바로 물어보지는 않았고 혼자서 나름 열심히 이런저런 해결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제시하는 방식으로 업무에 대해 상의했다. 팀장이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며 가장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처리방식은 ‘멀쩡한’ 팀장과 일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팀장이나 부서장 상담을 통해 부서 내에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아서 인사팀 상담을 신청해 본 적이 있다. 인사팀 상담을 가기 전까지 나에게 인사팀이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대책 없이 민원 부서로 발령을 내버린, 차갑도록 무심해서 무서운 존재였다. 인사팀. 사기업에서는 HR담당자라고 해서 인사 업무를 맡는 직원이 다른 업무와 통합하여 맡기도 하는 것 같지만, 공무원 조직에서 인사 업무 담당자는 대체적으로 인사 업무만을 담당한다. 이곳 공무원 조직의 인사 업무라는 것은 오래된 숲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다. 굳건한 채로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커다란 숲에 바람을 불어넣어 나 같은 홀씨도 날리고, 큰 나무들 사이로 환기를 하며 숲에 동력을 만든다. 매일매일 무난함을 표방하며 그럭저럭 굴러가던 회사가 떠들썩해지는 것은 대체로 연 2회 있는 인사발령 시기뿐이다. 공무원 업무의 경우 대부분 법정업무이므로 특별히 어떤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홀씨를 어떻게 어디로 날릴지에 대한 고민까지는 필요 없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신입이나 다름없지만, 인사팀 상담을 신청했을 때는 훨씬 더 연차가 적을 때였기 때문에, 나는 당시 인사팀 담당자가 나를 그저 맹랑하기 그지없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채 눈치도 없는 신입으로 볼까 봐 걱정했다. 괜히 밉보였다가 기피 부서로 발령이 나면 어쩌나 고민했고, 상담하는 내내 내가 너무 철없는 신입이라서 이런 문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눈치를 보느라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업무수첩을 가지고 상담실에 들어온 인사팀 담당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건 꽤 고민이 될 문제예요 주임님. 주임님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처럼 감정적으로 격한 리액션을 동반하지도 않았고, 이야기 도중에 맞장구를 쳐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문제가 누구에게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담담하게 공감해 주었다. 인사업무는 생각보다 매뉴얼이 탄탄하고 자세했다. 게다가 인사 담당자는 상담을 마칠 때까지 내가 작고 좁은 조직에서 이상한 애로 찍힐까 겁내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차분하게 매뉴얼대로 내가 가지고 온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었고, 내가 인사팀에 상담을 했다는 사실부터 비밀에 부쳐주었다. 걱정한 것처럼 소문이 나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인사팀 상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인사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정했다. 상담 이후 당시 담당자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고, 그 후 근무하는 동안 같은 문제로 다시는 인사팀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한 번의 인사상담을 계기로 인사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내면을 깎고 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혼자서 어떤 문제에 대해 끙끙 앓고 있다면 반드시 주변에 조언을 구해볼 것을 권한다. 팀장과 상의해 보고, 가까운 부서장에게도 이야기해 보고, 나아가 인사상담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나치게 주변의 시선이나 평판을 생각하며 근무경력 초반에 나의 어려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한다. 생각해 보면 근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평판이 생긴다면 얼마나 생길 것이며, 애초에 내가 누군지에 대해 남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내가 상담거리를 가지고 찾아간 사람들도 그저 사람일 뿐이고, 게다가 더 오래 근무하며 조직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고민에 공감해 주고 뜻밖의 해결책까지 제시해 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조직이 자발적으로 당신을 알아줄 리 없다. 퇴근 후의 일상에 집중하며 일상 속 회사의 비중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최소 9시간은 앉아있는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환경을 바꿔보는 데 조금은 적극적인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물론, 거대하고 오래된 숲을 절대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숲은 결코 젊고 연차가 낮은 직원들에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숲의 한가운데에 ‘라떼’의 강이 흐르는 곳이기 때문에 섣불리 MZ 그대로인 채로 접근했다가는 숲에 파묻히거나 숲 저편으로 내쳐질지도 모른다. 이야기한다고 해서 늘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른이니까, 용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과정도 조직생활의 일부일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