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n포자가 되기로 의도한 적은 없다만
얼마 전 갓 100일이 넘은 딸이 있는 E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 E 언니는 10대 시절 학교에서 만난 인연도 아니었고, 대학에서 만난 인연도, 회사에서 만난 것도 아닌, 덕질을 계기로 만난 인연으로 나와는 오랜 흑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같은 취미라는 공통점을 넘어서 언니와 나는 사진을 찍는다거나, 수집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등 전반적인 취향이 비슷했고, 거기에 두뇌를 쓰고 적당히 활동적인 것(예를 들면 방탈출)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그래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언니는 나에게 ‘즐거운 일을 기꺼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언니가 어느 날 출산을 했다.
‘즐거운 일을 기꺼이 함께 하는’ 나의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일은 솔직히 말하면 조금 서운한 일이다. 그런데 친구가 결혼, 임신과 출산의 길을 걷게 되면, 서운한 마음을 가지기에는 돌연 애매해진다. 예전에는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인생의 수순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이었다면, 지금 시대에 결혼과 육아를 선택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차원 같다. 거국적이고 숭고한 미션을 수행하는 친구에게 감히 ‘서운하다’는 수준의 옹졸한 마음을 품게 되어 송구스러울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남겨진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늘 같은 동네에서 보던 친구가 돌연 빛의 속도로 다른 우주를 향해 날아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너의 당황스러움은 한때이며,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친구와 인생의 궤적을 같이하게 되기도 한다고들 하지만, 당장 육아의 우주로 날아가버린 친구를 바라보는 미혼 세상 속의 나는 뭔가 끈 떨어진 연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된 것인지, 하필이면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것인지 최근 유독 주변 사람들이 결혼 또는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들에게 하마터면 "야 너두?"라고 답할 뻔했다. 아무래도 직업상 주변에 안정적인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서인 탓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들과 비슷한 환경 속에 있는 나는 단 한순간도 의도하지 않았음(강조)에도 어느새 연애, 결혼, 출산, 육아를 포기한 n포자가 되어 있었다. n포인생이라니! 내가 n포라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n포 상태는 단 한순간도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수동형이다.
특히나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제일 먼저 나서서 구국의 정신으로 임신과 육아를 장려하고 있고, 그에 따라 크고 작은 정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원래도 공무원은 그러했지만, 해가 갈수록 결혼과 육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혜택이 커지고 있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손해일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우리 조직에서는 요즘 4시 이후 사무실에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왕왕 들려온다. 육아시간을 사용하는 엄마는 물론이거니와 아빠들도 마찬가지로 많고, 그들의 숭고한 육아시간은 법적으로 정해진 것이므로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머지 업무는 누가 채울까? 그렇다! 엄마아빠들이 각자의 가정과 아이를 위해 떠난 빈자리를 채우는 건 바로바로 나, 의도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n포상태인 미혼(또는 비혼)들이다. 주변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아빠인 친구들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보면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거의 초인적인 일상이기에, 특히나 아이를 조부모 등의 도움 없이 부모 단둘이 키우는 경우 그 절박함과 정신없음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가도 어느새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남의 업무를 하고 있자면 불쑥불쑥 조금씩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임출육(임신, 출산, 육아) 장려 정책이 이렇게나 멋지게 제도를 갖추어 당연한 듯 조직 속에서 굴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종종 업무가 늘어나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시작조차 못하고 있느냐고? 너도 결혼하고 애 낳아서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정말… 그러게 말이다! 임출육 장려 정책에 대해 미혼(나는 비혼은 아니고 미혼이다)인 나의 솔직한 소감은, '흠… 그런다고 해도 섣불리 못하겠음.'이다. 결혼과 임신과 출산 등이 당연시되지 않고 전적으로 선택사항이 된 지금, 더더욱 단순히 ‘손해 보기 싫어서’ 아무나와의 미래를 그릴 수 있을 자신이 없다. 이건 아마 직업과 나이와 성별을 떠나 미혼(또는 비혼)들에게 공감을 살 만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모를까, 그래서 어쩌다 결혼을 해서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고, 어쩌다 육아를 하게 된다면 모르겠다만, ‘저 멋진 정책을 나도 이용해 먹기 위해서!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손해 보기 싫으니까!’라는 마음으로 아무나 붙잡고 결혼의 길을 선택할 자신이 없다. 아마 이런 상태이니까 아직도 결혼을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행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주변에 열심히 나의 구혼 상태를 알리고, 최대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글쎄올시다. 다른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마음인지 아직도 나는 섣불리 결혼을 하지 못했다.(늘 말하지만 결혼을 혼자 할 수 있었다면 나는 만 18세에 했을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저마다의 우주로 떠나는 지금, 수동형 n포자가 된 나는 이제 나의 우주를 구성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내가 선택한 직장은 '평생직장'이었으므로,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신분을 보장받기 시작하면서부터 '10년 뒤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곧 10년 차가 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제 학교에서 진로탐색 시간에 했던 것처럼 3년 뒤, 5년 뒤와 10년 뒤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지, 저 수많은 멋진 임출육 장려 정책들을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의 10년은 좀 더 나은 날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동형 n포자로 10년을 살 수는 없다! 나는 나 스스로가 즐겁게 살 수 있는 나의 우주를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선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미혼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덤터기나 쓰는 '수동형 n포자'가 아닌, 내 삶의 주체로서 능동적인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