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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촉 Oct 08. 2024

어느 날 종로: 서촌과 서순라길

7년 차 MZ 공무원이 살아가는 종로에 대하여

워라밸을 찾아서

   비록 월급은 하염없이 깜찍하더라도 한껏 지금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단단한(아직도 약과 정도의 수준이긴 하지만) 사람이 되기까지 꽤 혹독한 기간이 필요했다. 보통의 회사원들은 3, 6, 9의 법칙에 따라 3개월, 3년 단위로 위기가 온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처음 업무를 맡고 입사한 지 3일 만에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신규 시절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풀어보려고 한다.) 버티고 버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민원 공무원을 위한 전문 마음 상담을 신청했었는데, 처음으로 선생님이 나에게 조언해 주었던 것이 ‘퇴근 후의 일상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한창 신규였던 시절에는 회사 일이 끝나면 몸도 마음도 지쳐버려 멀리 가지는 못했고, 힘든 마음을 달래러 향할 수 있는 곳은 회사 근처의 동네들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기분전환을 위해 가기도 하고, 꾸역꾸역 일하면서 겪어보니 풍경이 예쁘고 사진이 잘 나와서, 오랜 세월이 깃든 이야기를 가진 곳이라 애정을 갖기에 충분하기에,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휴일에 친구들과 함께 종로의 곳곳을 찾기도 했다.


궁 너머 서촌에는 누가 살길래

   퇴근 후 가장 자주 들렀던 곳을 꼽으라면 단연 서촌이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구청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퇴근 후 회사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업부서에서 근무하며 사업 담당이었을 때 통인시장이나 세종마을 음식문화 거리를 누비며 온갖 식당을 다녀보기도 했었지만, 서촌은 주로 근무시간 외에 방문한 경험이 더 많다. 서촌은 너무 사랑스러운 동네이지만 ‘서촌’이라는 지명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서촌은 매우 직관적인 이름으로, 경복궁의 서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행정동은 주로 청운효자동에 걸쳐 있다. 청운효자동은 청와대가 있는 동으로 우리나라 1번 동이기도 하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지역번호가 들어가던 시절, 청운효자동은 0001번이었다. (나머지는 사직단의 이름을 딴 사직동에 걸쳐있는데, 사직동은 2번 동이다.)
   힙하고 핫한 가게들이 아늑한 골목마다 빼곡히 즐비한 북촌에 비해 서촌은 비교적 넓은 자하문로를 끼고 있고 위로는 청와대와 북악산을 향하고 있어 탁 트인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래서 서촌 거리를 걸을 때마다 사람이 마구 북적인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점심시간에 식당에 갈 때나 주말에 카페를 갈 때는 예외이다. 자하문로 양 옆으로 난 작은 골목 안에 보물 같은 가게들이 숨어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가깝고 종로의 유명한 시장 중 하나인 통인시장이 있는 곳이라 평소에도 유동인구가 있는 편인 데다 근처 직장인들이 식사를 하러 많이 방문하기 때문에 맛집이 많다. 역대 대통령들이 복날에 찾았다는 삼계탕집은 워낙 유명하니 차치하더라도, 마제소바 맛집, 젤라토 맛집, 에그타르트 맛집, 홍차를 예쁘게 내려주는 카페, 고로케 맛집, 크루아상 맛집, 초콜릿케이크 맛집 등 하나같이 소담하고 알찬 맛을 내는 가게들이 있고, 최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나온 청경채의 익힘이 좋은 중식당도 이곳에 있다.

    8년 전쯤 처음 교토에 가서 유카타를 입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닐  때, 버스 안의 교토 현지 사람들이 나의 유카타 차림을 전혀 어색한 시선으로 보지 않던 것이 인상적이었더랬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길거리에서 한복을 입는 것은 조금 특별한 시선을 끄는 일이었는데, 요즘의 서촌은 사람들의 한복차림이 꽤 익숙한 곳이 되었다.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한복을 대여해 주는 큰 가게가 많고, 한복 대여점과 제휴를 맺은 메이크업샵도 곳곳에 숨어있다. 경복궁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거나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한복 입은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서촌에서의 한복차림은 익숙하고 자유롭다. 서촌을 꼭 친구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다 같이 한복대여점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하루를 보내보기도 했었는데, 골목이 그리 좁지 않아 화려한 한복을 입고서도 거닐기에 좋았으며, 한복을 입고 식당이나 카페를 방문해도 사장님들이 평범하게 맞아주기도 했다.


   서촌은 경복궁과 청와대와 가까운 곳이어서 상대적으로 개발이 쉽지 않았던 곳으로 덕분에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이 들어 갤러리나 미술관이 곳곳에 있고 다양한 전시도 많이 열린다. 보통 전시라고 하면 진입장벽이 높은 편인데, 요즘 열리는 전시들은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여 비교적 접근하기가 쉬운 편이다. 아톰부츠로 유명한 미스치프 전시가 열렸던 대림미술관도 있고, 그라운드 시소나 갤러리들에서도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서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도 많은데, 근현대기에 활동했던 청전 이상범 화백이 살던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고, 구립 미술관으로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박노수 미술관도 있다. 볕이 잘 드는 작은 마당이 있는 이상범 가옥의 출입은 자유로운 편이고, 화가의 작업실도 볼 수 있다. 박노수 미술관은 생전 남정 박노수 화백이 살던 집을 미술관으로 만든 것으로, 건물이나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 서촌에는 공예공방이나 베이커리 카페도 많아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하면 그날 하루만큼은 미적 감각을 뽐내볼 수 있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는 퇴근 후의 일상을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해서 다녀보기도 했었다.


당신이 몰랐던 서순라길

   서울 지하철 1, 3, 5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을 나오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귀금속의 메카가 있다. 이 동네의 특이한 점은, 골목마다 법정동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크게 종로 3가라는 이름 하에 거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큰 길인 종로를 뒤로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돈의동, 봉익동, 묘동, 권농동과 같은 이름을 한 작은 동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매상가가 즐비한 귀금속 거리는 나 같은 길치에겐 아직도 OO동 OO번지와 같은 구주소가 없으면 헤매기 딱 좋은 곳이다. 귀금속 거리 옆으로 나오면 종묘가 있다. ‘전하,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여 주시옵소서’ 할 때의 그 ‘종묘’다. 가로로 길고 넓게 만들어진 종묘는 한옥 건축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건축물이며, 그 특유의 정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웅장함이 매력이라고 한다. 종묘 옆으로 난 길을 ‘서순라길’이라고 한다. ‘순라’는 요즘 말로 하면 순찰, 경비쯤 되겠다. 조선 시대 종묘의 도둑이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순라청을 설치했는데, 순라청이 있던 자리의 서쪽에 있는 길이라고 하여 서순라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지하철 종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와 앞으로 쭉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서순라길은 최근 구청에서 부쩍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다. 불법 주정차도 단속하고 주얼리센터 같은 공적인 시설을 한옥으로 꾸며놓은 덕분에 사진 찍기 좋은 예쁜 길이 되었다. 종로 3가 귀금속 거리와 종묘와 모두 맞닿아 있어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기에 10월 즈음이면 축제도 하고 갖가지 소소한 이벤트도 열린다. 종묘 공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창덕궁 방향으로 올라가는 모양으로 되어있는 서순라길은 공원과 종묘의 담장 때문에 상가가 양옆으로 마주하여 형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이 이 길의 중요한 특징이다. 한옥 스타일의 가게들을 구경하다 맞은편 종묘 담장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길 위에서 찍는 모든 사진들의 한편에 종묘 공원의 담장이 등장해 특별한 느낌이 든다. 덕수궁 돌담길 못지않은 종묘 돌담길인 것이다. 길 왼쪽에는 핸드메이드 주얼리 가게들이나 세상 힙한 루프탑 와인바가 한옥 스타일 건물에 들어와 있고, 오래된 작은 세공이나 주물 공장들이 있는 골목 사이로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예쁜 카페들도 숱하다. 주말에도 인파가 그리 많지 않아(물론 핫한 가게들에는 사람이 꽉꽉 들어차있긴 하지만) 천천히 골목을 구경할 수 있고, 차보다 사람이 더 많이 다니는 길이라 보도가 잘 되어있어 가게들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거리를 즐길 수 있다. 이윽고 길의 끝에 다다르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 나타나는데, 저녁 어스름해질 무렵 돈화문 앞으로 향하면 거리 양 옆의 청사초롱이 골목길 소풍을 완성한다.



퇴근하고 어디 갈까

   어디 일하는 게 마냥 좋기만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아직까지 계속 출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을 달래러 갔던 동네들에서 위로를 받고 정을 붙인 덕분인 것 같다. 새로운 곳을 발견할 때마다 그래도 종로는 원래 좋아했던 곳이니 조금 더 정을 붙여보자고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처음 1년 차를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면 이만큼의 시간이 쌓일 일도, 이만큼의 애정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퇴근 후의 일상을 만들고 하루하루를 겪으며 나는 점점 단단해졌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서촌이나 서순라길은 일상에 지쳐 위로가 필요하거나 기분전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곳이다. 지하철역 근처에 있어 접근성도 좋은 곳들이니 비록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한 번쯤 스며들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오랜 도시의 역사를 품은 골목들은 마을을 이루고 저마다 고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날씨 좋은 계절, 골목길에서 재미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당신이 위로받고 싶은 찰나들도 골목의 역사 속에 함께 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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