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에서 마시는 커피.

커피 이야기.

by 김커피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방송과 영화 관련 공부를 했던 나는 (당시에는) 여자로서나 사람으로서나 하기 힘들었던 전공 일을 포기하고 전향을 한 게 바로 커피였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독립해서 지내던 서울에서도 커피를 했고, 본가로 내려와서도 쭉 커피를 했다. 내게 커피란, 단순히 마실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통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주고 무한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어떤 요소다.

내 길었던 커피 경력은 둘 다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에서 쌓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평소 나의 커피 생활은 보통 흔히들 말하는 '개인 카페'에서 즐기는 편이다.


서울에서는 쉬는 날마다 새로운 카페를 찾아가는 재미로 살았던 내가 본가로 내려오고부터는 이상하게 커피 일을 하면서 커피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마 찾아보지도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카페는 없을 거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바꿔놓은 카페를 집 가까이에서 만났다. 이름부터 멋진 카페. ‘황실’이라는 타이틀답게 고급진 곳이다.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곳을 첫 방문 했었는데, 카페의 이름을 딴 시그니처 커피 '황실 라테'를 맛보고 묘한 맛에 반해버렸다. 사실 나는 어지간한 커피는 맛을 보면 대충 들어가는 재료가 짐작이 되고 얼추 비슷하게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 편인데, 도대체가 황실 라테는 아무리 따라 만들어 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였다. 적당히 달달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실 라테는 일반 우유와 시럽 등의 첨가물을 차례대로 넣어서 내는 맛이 아니라 매장 자체 블랜딩이 된 우유로 만드는 거였다. 어쩐지 아무리 해봐도 안 되더라..) 그런데 마치 나에게 금단 현상이 일어난 것처럼 그 커피가 계속 생각 나는 게 아닌가. 이후로 이 카페를 방문했던 이유는 오로지 황실 라테였을 정도다.


그리고 팬데믹을 맞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내 직업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꽤 오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반복하며 보냈다. 이제 한계야 답답해서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조심스럽게 나의 바깥 커피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오랜만에 찾은 황실은 처음의 그 분위기 그대로였다. 황실 라테의 맛도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굉장한 임팩트를 주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방앗간은 이곳으로 정해졌던 것 같다.


내가 카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악, 매장 분위기와 청결도는 '매우 양호' 상태였기에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커피의 맛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커피를 종류별로 맛보기 시작했다. 일단은 에스프레소 메뉴부터 시작해서, 필터 커피까지. 맛있었다. 쓴 것은 쓴 것대로, 단 것은 단 것대로 제각각의 맛을 뽐냈다. 로스팅부터 세팅, 비주얼까지 모든 부분을 세심하게 신경 쓰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고, 나만의 '커피집 기준'에서 부족한 데가 없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원두 셀렉을 보면 내 입맛에도 훌륭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렇게 나는 바깥 커피 생활을 지속하게 됐다.


카페의 외적, 내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 커피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기복이 없는 맛을 서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정성이 필요한 일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참 믿을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바리스타의 온 마음이 담긴 필터 커피, 브루잉이나 핸드드립이라고도 하는 이 커피는 사실 내게 황실 라테를 넘어서 0순위로 등극한 메뉴인데, 매장에 준비되어 있는 원두 라인 중에 내가 원하는 맛의 원두를 골라 마실 수 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이 필터 커피를 마실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모메의 주인장인 사치에에게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법을 가르쳐줄까요?” 하는 남자 손님과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맛보는 장면이다. 그 남자 손님은 분쇄되어 필터에 담긴 원두에 손가락을 넣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코피 루왁”하고 주문을 걸고, 천천히 끓는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잔의 커피를 맛 본 사치에의 눈은 동그래진다.

그 남자 손님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맛있죠?” 묻는다. 커피란 원래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게 더 맛있는 법이라며. 대사에 묻어내진 않았지만 커피 내리는 사람의 정성이 맛의 포인트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내가 필터 커피를 통해 보고 느끼는 것도 바로 그 정성이다.


더군다나 바리스타 분들이 친절하다. 물론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자주 찾는 공간의 사람들에게도 조심스러워 대화를 나눈 적은 딱히 없지만, 오피스 상권의 특성상 단골 고객이 많은 것 같았고 그런 고객들에게 인사 한 마디라도 더 건네는 다정한 바리스타들이 있다. 그런 바리스타들이 내려주는 커피는 당연히 맛도 다정하지 않을까. 나는 매번 그 다정함을 배우고, 더불어 내 다정을 키운다.


치킨도 그렇고 라면도 그렇고 꼭 그렇지 않나.

맛있는 건 오늘 먹으면 내일도 먹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출근한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 공간으로.



커피란 원래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게 더 맛있는 법이라며. 대사에 묻어내진 않았지만 커피 내리는 사람의 정성이 맛의 포인트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내가 필터 커피를 통해 보고 느끼는 것도 바로 그 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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