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바라는 나의 행복
여기 누구보다 나의 성공과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안나. 안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나의 성공과 행복을 바란다.
안나가 말하는 나의 유년 시절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안나의 말에 따르면, 나는 다섯 살 무렵, 리모컨을 마이크 삼아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구슬프게 부르며 가족들을 놀라게 한 것도 모자라 각종 도롯도(트로트)를 섭렵하며 동네에서 제일가는 인기 스타 역할을 했단다. 나에게는 그러한 기억이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날은 그 가녀린 입술을 모아 구슬프게 '립스틱 짙게 바르고오호호'를 부르는 나의 모습이 은근히 궁금하게 느껴지곤 한다.
안나는 '고 어린것'이, '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것'이 어떻게 그 가사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 그 노래를 그렇게 불렀을꼬, 하며 아직까지도 신통방통해한다. 안나는 나를 보며 늘 이렇게 말했단다.
안나 : 쟈는 커서 뭐라도 된다. 쟈는 뭐가 됐든 된다.
여기서 '쟈'를 맡고 있는 나는 아직 '뭐'일뿐이다. 이젠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누구보다 처량하게 감정을 실어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동네 인기 스타도 아니다. 나는 가끔 내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안나는 아직까지 나를 '쟈'의 범위에 넣어두었다. 안나는 나를 한 번도 밀어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상반되는 감정을 불러온다. 혼돈의 기쁨, 행복한 슬픔 같은 것들을.
안나가 그림을 그려준다고 했다. 매번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미친 듯이 갈기는 용도로 쓰이는 나의 노트와 펜이 멋쩍게 출격했다. 안나는 탁자에 노트를 펼쳐둔 채, 열심히 무언가를 그렸다. 안나가 무언가를 그리는 동안, 나는 무언가를 그리는 안나의 모습을 보았다. 안나가 무언가를 그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담고 싶었고, 오늘 나누는 이야기도 충분히 기억 해두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딱 그럴 시기였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은 시기. 잊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많은 것을 잊게 되는 시기.
안나가 첫 번째 그림을 완성했다.
지연 : 화가님, 그림을 설명해주시지요.
안나 : 예, 그러지요. 자, 이것이 뭐냐면, 참새여. 참새가 일단 바닥에 떨어진 거를 먹고 있는 거다이.
지연 : 잘 먹는 참새네, 크다.
안나 : 좀 크제. 깃털도 요래 있고, 발도 이래 있고.
지연 : 맞네. (사람 앞에 있는 뭔가를 짚으며) 이건 뭔데.
안나 : 부(나의 강아지 이름은 '부'다). 니가 지금 부를 산책시키고 있는기라.
지연 : 아, 이 사람은 그럼 내가?
안나 : 니지. 머리 짧게 잘랐다이가.
안나는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릴 줄 아는 화가였다!
안나 : 이거는 인쟈, 니가 살 집이라.
지연 : 내가 사는 집이라고?
안나 : 그래. 이거는 용마루. 봤제. 이그, 이게 기왓장이다이. 마이 얹었다. 특별히. 이거는 기왓장 끄트머리에 그 꽃같이 생긴 거, 그 끄트머리에 안 있나, 이런 거 있거든. 잘 사는 집에는 이게 있거든. 나중에 다닐 때 기와집 단지 봐라, 그른 거 다 있다.
지연 : 요즘에는 기와집 보기가 어렵다, 근데 뭔지는 안다.
안나 : 그래, 이거는 마리거든. 아니, 그. 마루. 마루. 방이 두 개라. 방문 여기 큰 거 중간에 있는 거 열고 들어가면, 이짜도 있고, 저짜로도 있고.
지연 : 오, 방이 두 개.
안나 : 이거는 신 벗는데. 돌 이래 되가, 이래, 신 벗는 곳. 이거는 신이다.
지연 : 신이 두 켤레네.
안나 : 그래, 니 신랑 생기면 신랑하고 니하고 살아라고.
지연 : 그럼 방이두 개니까 각방 쓰면 되겠네.
안나 : 무신 소리하노!
지연 : 나는 결혼 안 할 거라니까!
안나 : 그라믄 내가 가면 되겠네.
지연 : 그래, 할무이랑 둘이 살면 되겠네.
안나는 의외로 내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말에 쉽게 수긍하는 편이다.
안나 : 이거(오른쪽 아래)는 꽃밭에, 화단에, 꽃나무가 서가 있는기라. 이래, 있는데 인쟈 너거 외할아버지가 가 가지고 물 주고 있는 거다.
지연 : 아, 이거 서 있는 사람이 외할아버지가.
안나 : 그래, 지여이 집에 가서, 이제 꽃에 물 주고. 이거는 참새. 이거는 참새 새끼. 이거는 꽃. 이거는 풀. 잔디, 풀이다. 별 거 안 그맀다.
지연 : 이거(오른쪽 제일 아래)는 뭔데?
안나 : ……이게 뭐고.
지연 : (ㅋㅋㅋ) 할머니가 그렸잖아.
안나 : 아, 이거는 깨구리가. 뭐고, 아무튼.
안나는 잘 그려놓고, 가끔 자기가 뭘 그렸는지 까먹는다.
안나 : 아무튼, 성공해가 이런 집에서 살아라, 이런 좋은 집.
지연 : 그래, 성공할게.
안나 : 그래, 니 성공하는 거 보고 가야지.
지연 : 또 그 소리한다. 그럼 난 또 이 소리를 하지. 난 성공 안 해!
안나 : 성공을 왜 안 하노.
지연 : 성공하면 간다매, 그럼 성공 안 해야지. 그래야 할머니 오래 살지.
억지다. 투정이다. 쓸데없는 고집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안나는 그저 웃는다. 그러면 니나 내나 성공하지 말고 오래오래 살자는 말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다음 한동안은 정적이다. 그림을 보며, 우리는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안나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쁘게 그리지도 않았구먼, 뭐 자꾸 이쁘게 그렸다고 하노. 하나도 안 이쁘구먼. 됐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것이 어디고. 마음먹고 그리면 한다, 나도 한다.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외롭지 않게 신을 한 켤레 더 그렸을 안나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그러다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들면 다시 기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관둔다. 그러다 성공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것은 이미 실천하고 있으니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공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성공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되어도, 안나에겐 말하지 말아야지. 나만 알고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