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중에 제일 어려운 게 마음 정리
혼자 걸으면 유독 생각이 많아진다. 이럴 때 드는 생각들은 대부분 장르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리저리 무한대로 가지를 친다는 장점이자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생각들은 걷는 나를 지나쳐 앞서 가기도 하고, 나와 함께 걷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돌아보고 알아차릴 때까지 묵묵히 내 뒤를 따르기도 한다.
이런 날은 주변의 소리를 듣고 싶다. 매일 똑같은 음색과 똑같은 리듬의 노래가 아니라, 언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올지 정해져 있지 않은. 마치 즉흥 합주와 같은 주변의 살아있는 소리를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인간 메트로놈이 되어 모든 소리에 박자를 맞춘다. 타박타박 일정하게 걷는 소리 위에 여러 소리가 겹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 구르는 바퀴 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운동장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남학생들의 소리…….
혼자 걸으면 유독 청각이 예민해진다. 따로 노래를 듣고 있지 않을 땐, 신기하게도 주변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는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뱉어내는 소리에 굉장한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같은 순간에도 제각각 다른 분위기와 음정과 말투로 이야기를 뱉는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그 이야기들은 묘하게 이어지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혼자 걷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수화기 너머 있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를 듣고 안나가 생각났다.
안나는 내가 전화를 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전화가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이 되서였다. 나는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안나의 전화로 인해서 난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행여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남겨진 부재중 표시를 보고 내가 곧 다시 전화를 할 테니 언제든 편하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도 안나는 먼저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본인이 나에게 짐이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바람이 차가워졌다. 내가 걷는 공원은 연못을 중심에 두고 있어 바람이 조금만 달라져도 그 기온이 몸으로 느껴지곤 했다. 이제 겨울 옷을 꺼낼 때가 된 건가. 여름에 입었던 얇은 옷을 집어넣고 두꺼운 옷을 꺼내는 작업은 생각만 해도 고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면, 정리는 굉장히 어렵다. 정리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정리는 어렵다. 내 마음도 잘 정리하지 못하는데, 물건 정리가 뭐가 쉽겠는가.
안나는 다르다. 안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룰대로 정리한다. 안나는 정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넘(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내가 하는 방식대로만 하면 되는 거라. 그게 정리 잘하는 방법이야. 내가 딱 필요한 거, 내가 자주 쓰는 거 가까이에 두고, 내가 아는 곳에 잘 넣어두면 되는 거 그기 정리지.'라고.
내가 마음 정리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면, 안나는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안나 : 정리를 잘하고 싶으면, 일단 뭘 정리할 건지를 먼저 봐야 한다카이. 어디에 담을 건지, 뭐를 담을 건지, 담을 거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쬐까난 곳에 이따만치 큰 거 쑤셔 넣어 봐라, 그게 들어가나. 그니까 일단 다 엎어놓고,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보는 기라. 뭐가 짜증 났는지, 뭐가 아닌지. 버릴 건 버리고. 원래 정리는 버릴라고 하는 겅께. 버릴 거 버리고, 넣을 거 넣고 하다 보면 자리 없고 막막한 거 같아도 다 들어가.
마음 정리에 도가 튼 것처럼 말하는 안나가 주로 하는 정리는 약 정리다. 안나는 나에게 이야기한 방식대로 병원에서 받은 약과 자신에게 필요한 갖가지 약을 커다란 박스 안에 모두 쏟아부어 정리한다. 약은 너무나 많고, 상자는 터무니없이 작다. 하지만, 그렇게 넣으면 뚜껑이 닫히지 않을 거라는 내 말과 달리 뚜껑은 잘만 닫힌다. 뚜껑을 닫고 난 후 의기양양한 안나의 표정을 나만 본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여러분도 같이 봤어야 하는데…….
안나가 전화를 받았다.
안나 : 춥제.
지연 : 이제 좀 추워지네.
안나 : 바람이 다 그렇다.
지연 : 바람이 뭐라고?
안나 : 바람이 다 그렇다고. 봄에 불거나 여름에 불어도 싸한 바람은 싸하다. 그런 바람은 님의 바람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라 상당히 찹다. 단단히 여미라, 단단히.
님의 바람. 하필 이름도 님의 바람이라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조금 더 걸었다. 안나가 말을 이었다.
안나 : 니도 얼마나 속이 답답하겠노.
지연 : 내가 뭘……. 나는 다 괜찮다.
안나 : 맨날 괜찮다, 괜찮다. 니한테 괜찮냐고 물어본 내가 죄다.
지연 : 진짜 괜찮다니까.
안나 : 니는 맨날 괜찮다는 말밖에 못 하잖아. 안 괜찮다고 한 적이 읎다.
맞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는다. 진짜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을 할 때가 있고, 괜찮지 않은데도 버릇처럼 괜찮다고 말할 때가 있다. 또 어떨 땐, 괜찮고 싶어서 주문처럼 괜찮다는 말을 내뱉을 때도 있다. 지금에야 글을 쓴답시고 이렇게 풀어놓아서 그렇지, 사실은 '괜찮다'는 말을 뱉을 땐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작동적으로 나오는 거다. 자동응답기처럼. '안녕하세요, 괜찮은 김지연입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같은.
뭐가 됐든 괜찮다는 말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안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에게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하라고 이야기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나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 질문들에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안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에게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하라고 이야기한 유일한 사람이며,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안나 : 나는 니 맴을 다 안다.
지연 : 할머니가 내 마음을 다 안다고? 좋다, 좋네.
안나 : 다 알지, 하모. 긍께, 할무이한테는 편하게 얘기해라. 내가 누구한테 또 말하겠노.
지연 : 다 이야기하잖아. 다 이야기한다.
안나 : ……뻘 밭에 장화 신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지연 : 그게 뭔 느낌인데.
안나 : 말 그대로다.
지연 : 나는 괜찮다니까.
안나 : 알았다, 알았다.
지연 : …….
안나 : 전신만신에 다 신경 쓰지 마라. 사람은 겪어봐야 알고, 물은 건너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지금 다 겪는 중이고, 건너는 중이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다 소용없다.
지연 : 지나고 나면 다 소용없다고? 소용이 있어야지! (괜히 장난스레 말해본다)
안나 : 다 필요 없다. 그냥 지나가는 거 다 흘려보내고 해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하지 마라!
지연 : 알았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게. 바보처럼 안 살게!
안나 : 세상에 바보가 어디 있나. 참는 거지. 참을 줄 아는 거지.
안나는 모든 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잘 되는 일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일도 분명히 있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는다. 긴 통화 내내 나를 탓하는 말은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 다 괜찮다 한다. 안나는 나더러 괜찮다는 말을 하지 말라면서, 본인은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던진다. 이래도 괜찮다, 저래도 괜찮다, 너 그렇게 해도 괜찮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끊임없이 괜찮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안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