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장 뉴그랜져를 탄 할머니

뭐든 더 주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by 김단한

안나와 나의 대화는 대부분 '그거 기억 나나'라는 말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떠오른 뭔가를 이야기하면, 그거에 맞춰 또다시 떠오른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말이 이어지는 것이다. 둘의 기억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예 한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나야 너무 어렸을 때라 안나가 말하는 어린 나의 '여우 같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해도, 안나는 나의 기억 모든 순간에 등장했으면서도 종종 어떤 일은 잊곤 했다. 나는 그것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안나와 내가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내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바야흐로 천방지축 아홉 살. 남동생이 태어난 해였다. 나는 엄마가 동생을 품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기억은 자기들끼리 붙어버린 책장과 같다. 딱 붙은 하나의 기억 덩어리. 나는 동생이 생겼다는 것을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때의 나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시간이 훌쩍 넘어 동생이 태어났다. 뿅 하고 나타난 것처럼.


나는 동생이 밉지 않았다. 그저 앓아누웠을 뿐이다. 나는 동생이 태어나면서 동생이 엄마를 너무 많이 아프게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아픈 소리를 듣고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 옆에 기어코 비집고 누워 덩달아 몸조리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는, 또 몇 장의 책장이 그냥 넘겨진다. 다음의 기억은 집이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품엔 아주 작은 아이가 있다. 나의 동생이다. 엄마와 아빠는 동생을 조심스레 안방으로 데려간다. 함께 온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함께다. 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 거실에 서서 보고 있는 것이다.


지연 : 그때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할머니는 기억하제.

안나 : 기억하지.

지연 : 그때, 진짜 동생이 미운 건 아니었거든! 근데…… 그냥 좀 기분이 이상했다고 해야 하나? 저기 안방 침대는 나랑 엄마랑 아빠만 누워있던 자리인데, 왜 갑자기 나는 밀려났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안나 :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지연 : 아무도 내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내가 방방 뛰면서 막, 땀을 막 낸 다음에, 거실에 드러누워가지고 소리 질렀잖아. 나도 아프다! 나 봐줘! 나 아프다!

안나 : 그래! 기억난다.

지연 : 근데 그때 할머니만 딱 나한테 와줬잖아. 지연이 아프단다! 하면서…….

안나 : 그래, 그 어린것이 갑자기 얼마나 지딴에는 띵했겠노. 첫 손녀라서 몇 년 동안 양쪽 집안 사랑, 뭐 즈그 엄마 아빠 사랑 혼자 다 받다가 갑자기 동생이라고 하나 띡 태어났는데, 아무도 지는 신경 안 쓰고 거기 몰려있으니까 얼마나 그랬겠노.

지연 : 역시, 이해해주는 건 할무이밖에 없다.

안나 : 내삐없지!


그랬다. 그 어린 마음. 나도 잘 모르겠어서, 괜히 더 혼란스럽고, 괜히 더 짜증 나는 그 마음을 '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안나뿐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때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그때의 짜증에 대해, 그때의 알아줌에 대해.


안나는 그 이후로 우리 집에 더 자주, 더 많이 왔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검은색 뉴그랜져 자동차를 가지고 계셨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곤 했다. 반짝반짝 닦아놓아 과할 정도로 빛나는 그랜져의 문을 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등장하면 어떤 사람들은 길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패션 센스는 상당했다. 할아버지는 늘 정장을 입고 오셨고, 할머니는 강렬한 호피 원피스를 입으셨는데 두 분 모두 까만 선글라스를 장착한 탓에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아빠는 차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차가 멈춰섬과 동시에 달려가 두 분을 맞이하곤 했다. 우리가 가는 이유는 분명했다. 마중도 마중이지만, 트렁크에 왕창 실린 음식과 물건들을 꺼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빈손으로 우리 집에 오시는 법이 없었다. 두 분은 늘 무언가를 가득 들고 오셨고, 그것을 들고 나르는 것을 몇 번을 해야 온전히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트렁크를 채운 대부분의 물건은 음식이었다. 안나는 직접 만든 반찬을 자주 가져다주셨다. 나는 그중에서도 잡채를 좋아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잡채를 좋아하지만, 당시 안나가 만들어주신 잡채의 맛을 내는 잡채는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안나가 만들어주는 잡채는 맛이 짜면서도, 달달했다. 입맛이 딱 맞았다. 결코 질리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갖가지의 변형이 가능했다. 할머니, 다음에는 어묵 많이. 그러면 어묵과 당면이 5:5로 담겨왔다. 할머니, 다음에는 당근 많이! 그러면 다음엔 주황색 잡채가 도착하곤 했다.


안나 : 그래서 니가 준 편지 아직도 내가 고이 모셔놨잖아.

지연 : 내가 준 편지?

안나 : 그래, 니가 뭐 콤퓨타 시간에 써서 집으로 보냈던 거 있다. 나중에 보러 온나.

지연 :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는데?

안나 : 부자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며칠 후, 안나의 집으로 찾아갔다. 좁은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 후, 우리는 함께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2001년의 내가 안나와 외할아버지께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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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사랑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랑스런 손녀, 손자 지연이와 도일이에요.
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무척이나 좋아요.
왜냐하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다녀가시면 우리집 냉장고는 부자가 되고, 저희도 부자가 되니까요.
그 이유만으로 좋아한다는 이유가 아니고 저희들을 무척이나 사랑해주셔서 정말 기뻐요.
그리고, 이쁜옷과 도일이의 장난감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일이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마이 사랑 한대요"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몸조심하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럼 전 이만....

2001년 2월 25일 일요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손녀, 손자드림-


안나 : 을매나 착하노.

지연 : 맞아, 착했네. 근데, 할머니 그거 아나. 여기에 보면 처음에는 '사랑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라고 적어놓고, 다음에 인사할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이렇게 해놨잖아.

안나 : 응.

지연 : 왜 그렇게 썼는지 아나. 나 맨날 편지 쓸 때마다 외할머니를 먼저 쓰고 그다음에 외할아버지를 적곤 했거든. 근데 외할아버지가 삐진 거야! 갑자기 내한테, '니는 왜 맨날 외할머니를 먼저 쓰노' 이러시대. 그래서 그때부터 그거 생각해가지고, 번갈아가면서 쓴 거야.

안나 : 하이고, 너거 할아버지도 참 밸걸 다 지랄…….

지연 : 욕 노노! 그리고, 보면 도일이(남동생)는 어렸잖아. 그래서 얘는 편지 쓸 줄도 모르고, 그때 네 살밖에 안 됐는데 내가 그냥 편지에 끼워준 거야.

안나 : 그래, 니가 어렸을 때부터 니 동생 하나는 기가 맥히게 잘 챙깄다. 니가 다 키았지.

지연 : 역시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해주는 건 할무이밖에 없네!


안나는 그렇지! 맞장구치며 웃는다. 나는 안나를 따라 웃으며 꼬깃꼬깃,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접힌 부분이 찢어질 듯 간당간당한 편지를 내려다본다.


썼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편지다. 쓴 사람은 오래전에 잊었는데, 받은 사람은 이렇게나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안나만 잊는 줄 알았는데, 나도 잊고 사는 것이 많다. 이상하리만치 그게 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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