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일까.
2019년, 내가 지독하게도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답을 찾으려 했던 질문이다.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내왔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달력이라고 칭하고 싶다. 이유는 없다. 그냥 지금 내 눈 앞에 달력이 있어서다. 나는 달력이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줬다. 고맙게도 달력도 내게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나의 지분이 꽤 크다고 말해줬다. 그러고 내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근데 달력은 내 옆에 없었다. 나는 실망을 했고, 그때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내게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내 과거를 뒤돌아 봤다. 어떤 친구들과 아직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지. 한때 친했던 친구들과 왜 멀어졌는지. 여태까지 연을 맺었던 사람의 수만큼이나 이유는 다양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특별한 기준 없이 내 주변에 사람들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떠나게 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나의 행동과 노력은 없었다는 것. 웃음도 스트레스도 참 많았다. 그럼 이제라도 친구라는 존재를 정의해볼까.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친구, 좋은 친구?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질문을 시작하게 만든 달력이라는 친구가, 나 힘들 때 옆에 없었다는 이유로 내게 ‘친구의 정의’를 세울 기회를 주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 시기에 카메라라는 친구도 없었고, 텀블러라는 친구도 없었고. 다 없었다. 그럼 그 친구들은 내 친구가 아닌가? 그러기엔 카메라도 텀블러도 나한테 너무 소중해. 그렇다면 다시 친구라는 존재를 정의해보자.
만나면 좋은 친구?
MBC인가. 달력이나 카메라나 텀블러처럼, 누군가를 만났을 때를 곱씹어봤다. 오고 가는 대화 중 85% 정도는 내가 청자 역할이더라. 성격 특성상 내 얘기를 하기보단 들어주는걸 편하게 여겨왔던 듯하다. 아니면 내가 만나는 사람 족족 들어주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나. 과거의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다. 가족보단 친구일 정도.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면서 내 생각은 바뀌었다. 친구보단 나 혼자라고. 큰 고민이 없던 때의 나는 청자 역할, 잘했다. 이때의 나에겐 만나기만 하면 다 좋은 친구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힘들다. 나도 털어놓고 싶다. 안 그래도 복잡한 나의 번뇌가 타인의 번뇌와 만나니 서버가 다운되더라.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아무도 안 만나기로.
친구를 대신할 것들은 많았다.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친구 따위 다 필요 없어. 하면서 오는 연락들을 쌀쌀맞게 대했다. 단톡방이 생기면 나가고, 기존 단톡방도 이유 없이 나갔다. 개인톡이 오면 씹고, 만나자고 하면 거절했다. 그리곤 친구와 함께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곤 했다. 스쿼시, 걷기, 뛰기, 북바인딩, 그림 그리기. 시공간 제약을 받지 않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이것들만 있으면 나는 평생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행복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로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생각할 기회가 주어졌다. 툭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온종일 생각했다. 크게 3가지더라. 그중 하나가 ‘사람 만날 때’였다. 이를 깨닫고 실소가 나왔다. 오로지 나를 위해 1년 내내 고민하고 질문해서 내린 나의 행동들이, 내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의 정의는?
아직 답을 못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딴 거 안 세우려고 한다. 적어도 나한텐 내 스스로를 옥죄는 질문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대학생은 사랑, 인생, 죽음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할 시기라고. 여기서 대학교를 20대로 확장해서 해석하고 싶다. 그 일환으로 나는 2019년 내내 친구에 대해 생각을 했고, 답을 내리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3가지는 내가 원하는 때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젠, 그 기회들이 오면 잡을 거다. 사람? 만날 거다. 상대방이 자기 얘기만 한다면 나도 이제 내 얘기할래. 나 힘들 때 달력이 옆에 없으면 어때. 휴지가 옆에 있어주는 걸. 이렇게 1년 동안 날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끝. 이제 타이레놀 안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