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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Mar 01. 2024

늑장의 대가

적응이 안돼

  지난 학기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다 채웠다. 이번 학기에는 수업을 안 들어도 되지만, 어째 욕심이 나서 수업을 세 개나 신청했다. 한 학기 두 과목 듣는 것도 '헉!' 했으면서. 

  수업은 이미 일주일 전에 시작되었고,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일주일이나 늦게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우리 학교는 학기가 시작하고 2주간 수업 방청을 하고 맘 바꿀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수강 신청을 안 해놓으면, 그 수업의 강의 자료나 교실이 바뀌었네 어쨌네 하는 정보가 오지 않기 때문에 수강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단 신청해 놓고, 아니다 싶으면 2주 안에 취소하면 될 일이다. 


  이 일을 어쩌나, 첫 주 수업을 빠진 채로 두 번째 수업을 들어갔더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화요일 수업은 포기

  화요일 수업은 코퍼스 관련 수업인데, 두 번째 시간에도 한 시간이나 지각했더니 뭔 소리를 하는지 따라잡지 못해 수업이 엄청 어렵게 느껴졌다. 

  코퍼스와 관련해 논문을 쓸 건 아니지만, 인공지능의 발달과 함께 이 영역의 연구가 굉장히 대단한 것처럼 유행하고 있어, 나도 좀 알았으면 싶어서 욕심을 내서 신청을 했더랬다. 

  노트북을 가져와서 코퍼스를 조작해서 결과물을 찾아내고 조별로 발표하고 뭐 이런 건데..... 흑, 자신이 없다. 막 노트북을 바꿔서 아직 적응도 다 못했단 말이지.


  오늘 만난 그레이스가 하는 말이, 수업 한두 시간만 교수가 수업을 진행하지, 대부분은 학생들이 논문 한편씩 맡아서 읽고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 집에서 코퍼스를 이리저리 조작해 보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한 주에 두 편의 논문을 읽고, 그 논문에 대한 평론까지 써가며 이 수업을 들으려고 하냐는 것이다. 

  "넌 왜 듣는데?" 내가 물었다.

  "난 중국어 교재에 실린 문형들이 자주 쓰이는 것인지, 단어배합 시 빈도 높은 것을 채용했는지 뭐 이런 걸 주제로 논문을 쓸 거라서 코퍼스가 필요해."

  "나는 교재를 제작하는 거지 분석하는 게 아니라서, 코퍼스는 딱히 필요가 없긴 해."

  그녀의 지도교수가 바로 홍교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나한테는 수강하지 말라는 수업을 자기는 왜 수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도교수의 수업은 들어야 한다.

  거기다가 올해는 북경대학교 학생이랑 온라인 토론하는 수업을 몇 번 하는데, 누구한테 지기 싫어하는 홍교수의 스타일로 봐서 학생들을 거의 다죌 거란다. 

  그럼, 난 깨끗이 포기하는 걸로. 


수요일 수업은 어쩌지? 

  수요일 수업은, 방청해 볼 기회도 없이 선택할지 말지를 결정을 해야 되게 생겼다. 첫 번째 시간은 한국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참석 불가, 두 번째 시간은 대만의 공휴일이라 수업이 열리지 않았다. 

  '일주일씩이나 늦게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 아, 된장!'

  이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나 실라버스를 보니, 교수님은 한 주에는 장자와 열자의 글 일부를 강의하시고, 그다음 주에는 학생들에게 그 내용으로 중국어 교재를 만들어보게 하신다. 예전에 그녀의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랑 진행방식이 비슷하니 어째 대충 따라갈 것 같기도 하다. 

  중국어로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국어로, 실라버스에 나와있는 첫 주제인 장자의 소요유가 어떤 책인지 검색을 좀 해본다. 소요유는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노는 삶'을 뜻하는데, 이게 장자가 설파하고 싶었던 사상이란다. 

  '어머! 이건 바로 내가 사는 방식이잖아!  이 수업은 내가 꼭 들어야겠는걸.' 이렇게 오해를 한다.


  moodle(전자학습 플랫폼)에 다음 주 수업 전에 제출해야 할 숙제가 올라와 있다. 논문을 읽고 질문 3개를 만들어내고 예상 답안지를 작성해서 월요일까지 제출하란다. 논문은 58페이지나 된다. 나는 제목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붕은 누구의 소유인가?-소요유 중의 대붕의 은유의 경계 위계 해독>. 검색을 해보니 대붕은 전설 속의 새이고, 소요유는 장자가 쓴 책의 첫 장 명칭이다. 논문의 첫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다. 첫 페이지를 읽는 동안 나는 줄곧 단어의 뜻을 찾아야만 했다.          

  '이건 원옌원(文言文) 수준이잖아.'

  원앤원은 고전 문어체 중국어로 모국어자도 딱 그 문장을 안 배우면 무슨 뜻인지 모른다. 한국의 상황으로 비유하자면, 초등학생이 '용비어천가' 원문을 읽는 느낌이랄까. 이런 걸 일주일 동안 58페이지나 읽어내라고? 

  나는 정말 도가 사상가 장자와 열자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원옌원(文言文)을 읽어내야 한다면 능력밖이다. 이 수업도 포기해야 하나?


목요일 수업도 포기

  문법교수는 이번 학기에 편장분석과 회화분석의 두 수업을 열었다. 나는 회화분석이 편장분석보다 쉽지 않겠나 하고 수강신청을 했는데, 다들 회화분석이 제일 어렵단다. 

  교수가 하는 설명은 대체로 알아듣겠는데, 회화분석과 관련된 논문을 읽고 분석해서 발표할 자신은 좀 없다. 기말 때 이 주제로 소논문을 써낼 자신은 더더욱 없다. 

  오늘 교수가 논문 여러 편을 대충 설명하며 회화분석 논문이 어떤 건지 맛배기를 보여줬다. 회화 속의 '对'랑 '真的'의 기능 차이나 '就是' , '就是说', '就说'가 어떤 기능 차이가 있는지 분석한 논문이었는데, 내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다르게 분석을 해 놓은 것이다. 

  '이런 걸 어떻게 분석해 낸단 말이야?'

  나, 이것도 포기해야 하나 보다.


심각하게 살 거 뭐 있나

  졸업학점을 다 채웠다고 마음이 긴장하지 않아서 그런가, 수강신청한 과목 중 어느 것도 내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게 없다. 기분, 완전히 우울하다. 어째 날이 갈수록 중국어가 퇴보하는 느낌이다. 교수가 뭔 말을 하는지도 똑똑히 못 알아듣겠고, 논문은 거의 암호 수준으로 안 읽히고. 


  지금? 

  암울한 기분으로부터 조금 회복했다. 셰어하우스에 내가 없던 동안 새로 들어온 독일남자 TK랑 몇 마디 나누고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난 독일로 돌아가서 살 생각이 없어. 따뜻한 나라에서 살 거야. 독일 추워서 싫어. 일단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맘에 들면 거기 정착하는 거지. 방금 일본에서 대만으로 넘어왔고, 대만에서 3개월 지내고 다음은 태국으로 넘어갈 거야."

  그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고, 결혼도 했었고 이혼도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싫어서 그냥 훌쩍 동방으로 날아왔다. 

  티켓의 삶의 태도에 나까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그래, 심각할 게 뭐 있나. 힘들여 산다고 잘 사는 건 아니잖아? 내가 교수하겠다고 박사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수업을 선택해 놓고 어렵다고 절망할 거 뭐 있남. 모국어자들도 쉬운 과목 찾아 몰려가는데, 뭐 하러 어려운 거 굳이 듣겠다고 자신의 능력 탓까지 해가면서 우울해하느냔 말이지. 

  까짓 거, 수업 듣는다고 어떻게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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