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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Jun 19. 2024

선량한 지도교수

    이번 학기에는 '졸업논문 주제를 정한다'가 목표였고, 다른 건 다 부수적인 일이었다. 석사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슨 주제로 쓸까?' 였던지라, 박사논문의 주제를 잡는데도 한 학기쯤 생각을 해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지도교수를 만나 '저, 한 달 뒤에 졸업논문 주제를 정해올게요'라고 선언하고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고, 논문 개요를 작성하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또 하나 떠올라 무려 2개의 주제에 대해 개요를 작성했다.  

    그리고 오늘, 둘 중 하나로 박사논문 주제를 확정 짓기 위해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다. 


    내가 설계하려는 중국어 교재의 모델이 될만한 것이 있어,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제가 이런 느낌으로 만들 생각이라고 말씀드리는 중이다.

    "클릭해서 들어가면 교재의 몇 페이지를 미리 보기 할 수 있어요."

    웹 페이지에는 지금까지 발행된 열서너 개의 같은 시리즈의 교재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내 지도교수는 그 많고 많은 예 중에 하필 두 미녀가 치파오를 입고 있는 사진의 표지를 클릭했다.

    '교수님, 여자 밝히시나? 아, 좀 의외다!'


    내 지도교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쳐다보는 법도 없다. 우리 과는 대부분이 여자인데, 교수는 여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찬 교실에서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교실 저 끝 천장을 쳐다보고 수업을 하신다. 중년이나 된 그가 어째 어린 여학생들을 쳐다보지도 못하나 싶어서,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더랬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많은 책표지 중에 하필 미녀 사진의 표지를 클릭한다? 


    나는 지도교수의 행동을 이해해야겠어서, 룸메이트 메이쓰를 테스트해 본다.

    "메이쓰, 너 같으면 이 표지들 중에 어느 걸 클릭해보고 싶을 것 같아?"

    "이거." 메이쓰는 중국의 한 관광지 풍경 사진의 표지를 골랐다. 

    "왜? 이걸 선택한 거야?"

    "풍경이 예뻐서."

    그렇지? 많은 것들 중에 하나를 클릭해서 본다면 자기한테 가장 당기는 걸 클릭해서 보게 된단 말이지.

    "내가 아는 누가, 이 많은 것 중에 미녀 사진이 있는 이걸 클릭하지 뭐야."

    "나도 처음에는 그걸 클릭할까 싶었어." 

    "왜?"

    그녀의 설명을 듣고서야, 내 지도교수에게 붙인 혐의를 걷는다. 우리는 컴퓨터 화면을 볼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기 때문에 가장 왼쪽에 있는 그 표지에 먼저 눈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지도교수는 여자를 밝혀서 그걸 클릭한 게 아니라,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왼쪽에 있는 걸 클릭한 거였다. 이건 완전, 지도교수에게 혼자 마음이 있는 내가 만들어낸 오해였던 것이다. 


    지도교수는 나만큼 선량해서 나는 내 지도교수에게 좀 홀려 있다. (음, 나는 선량한 사람을 좋아한다.) 내 지도교수의 선량함은 우리 과 학생들이면 다들 안다. 그는 학생들을 고의로 곤란하게 하는 법이 없다. 개강 때는 교실 가득하던 학생들이 기말로 갈수록 반으로 줄어도 절대 출석을 부르는 법이 없다. 자기가 맡은 부분만 충실히 발표하면, 출석에 상관없이 성적도 후하게 준다. 

    나는 이런 것을 선량하다고 하지만,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석사 논문 쓰던 때를 예를 들며 내 지도교수의 선량함에 대해 칭찬을 했을 때,  루어삔의 반응은 이랬다.

    "내 지도교수는 내가 뭘 써가도 다 오케이였어. 다시 써오라고 한 적이 없어."

    "그건 좀 무책임한 거 아니니? 지도교수가 엄밀히 점검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뭐든 다 오케이 하면 우리 논문이 어떻게 제대로 쓰이겠어?"

    내가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내 지도교수의 특성이 다른 학생의 눈에는 무책임하고 엄격하지 않다가 되기도 한다. 


    나도 가끔은 그의 선량함이 답답해 보일 때가 있다. 한 번은 연구실에서 내가 지도교수와 면담을 하고 있을 때, 누가 찾아왔다. 한 남학생이 추천서가 필요하다며 자기가 써온 추천서를 내밀고, 밑에 교수님이 싸인만 해주시면 됩니다는 식이었다. 내 지도교수는 그걸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뭐라고 썼는지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해 달라는 대로 그냥 사인을 해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렇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그의 선량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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