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를 샀다. 나는 로또 따위 사는 사람이 아닌데!
물론 복권에 당첨되기를 원하기는 한다. 사지도 않는 복권에 어떻게 당첨이 되느냐고? 그럴 수 있는 것이, 대만에서는 물건을 사고 받는 영수증이 바로 복권이라서 내가 따로 돈을 지불하고 복권을 사지 않아도 복권에 당첨되는 달콤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대만 영수증의 맨 위에 8개의 큰 숫자가 있는데, 그게 복권번호다. 끝 번호 3개가 맞으면 대만달러 200원, 4개는 1000원, 5개는 4천 원, 6개는 1만 원, 7개는 4만 원, 8개 다 맞으면 20만 원이다. 특상과 특별상은 완전히 새로운 번호 8개가 다 맞아야 하는데, 상금은 각각 2백만 원, 1천만 원이다. (이 금액은 전부 대만달러로 그렇다는 거다. 한국돈으로는 여기에 대략 45를 곱해 보시기를. 내가 막 대만 생활을 시작할 때는 38을 곱해도 되었었고, 대부분은 40이었고, 좀 쌀 때는 36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마무시하게도 45가 넘는다.) 1월과 2월에 받은 영수증은 3월 25일에 발표가 나고, 3월과 4월 영수증은 5월 25일 발표가 나는 식이다. 나는 어느 달에는 한꺼번에 200원짜리 2장, 1000원짜리 1장이 당첨됐다.
아, 대만 복권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조 현상'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경위는 이렇다.
언니와 나는 팔공산 갓바위 가는 길이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잡아탈 수 있는 시내버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동생의 차를 얻어 타고 와촌까지 가서 거기서 803번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자주 오는 시내버스가 아니라 좀 기다려야 해서 추위도 피할 겸 편의점에 들어가서 좀 앉아있기로 한다.
"아무것도 안 사고 들어가 앉아 있기 좀 그렇지 않나?" 언니의 반응이다.
"그러려나?"
"로또 사야 되겠다." 편의점 앞에 로또 2등, 3등에 몇 명이 당첨되었다는 플래카드가 쭉 붙어 있는 것을 보더니, 언니기 말한다.
복권을 일단 사야 당첨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그다지 말리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데 왜 쓸데없는 돈을 쓰냐고 타박했겠지만, 로또 판매 수익금은 여기저기 쓰이는 거니까 당첨이 안되면 사회에 기부하는 셈 치면 되니 뭐 잔소리할 일도 아니다 싶었다.
"로또 한 장에 얼만데?"
"오천 원."
'오, 싸지 않네?'
언니는 로또가 구겨질까 봐 조심조심하며 고이 가방에 넣었다.
도로 쪽 창쪽으로 난 선반형 테이블에 앉아있자니, 편의점 앞에 걸린 플래카드가 펄럭이며 '이 편의점에서 2등이 몇명 나왔고 3등이 몇명 나왔다'고 내게 계속 알린다. 언니와 나는 땅의 기운 뭐 이런 거 좀 믿는 편이라, 로또 당첨 잘 되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로또를 살 때는 '1등에 몇 번 당첨되었다' 하는 소문난 곳에서 사는 것이 당첨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 여기도 제법 많이 당첨되었군...'
거기 앉아서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이니, 거리가 조금 있긴 하지만,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가면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언니가 나가서 기다리잖다. 30여분 단위로 있는 차를 행여나 놓치면 그것도 귀찮은 일이라 그러기로 한다. 버스는 좀체 오지 않고, 나는 편의점에 자꾸 눈이 간다. 2등과 3등에 몇 차례 당첨되었다는 플래카드는 펄럭펄럭 나를 향해 손짓을 한다.
"나도 하나 살까?" 내가 묻는다.
"사라." 언니가 답한다.
뛰어가서 한 장 사서, 언니처럼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잘 넣었다.
토요일이 되어 번호를 찾아봤다. 설마 5등 5000원쯤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된장, 꽝이다.
그리고는 화락 깨달으며 실망감이 스민다. 이 실망감은 당첨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동조 현상'에 빠진 것에 대한 것이다. 평소에는 로또를 사지 않는 내가, 언니가 로또 사는 것을 봤고, 플래카드가 펄럭펄럭 나를 유혹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나답지 않게 로또를 산 것이다.
솔로몬 애쉬의 심리학 동조 실험은 77%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바꿨고, 23%의 사람만이 집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이 23%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자신했는데, 로또 한 장이 내가 77%에 속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런!
사람을 실망시키는 로또, 다시는 사지 않을 테다.
'나는 집단의 압박에 착하게 순종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