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 치료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날씨 : 맑음
걷기 : 만하린(Manjarin)에서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23km)
만하린의 오스피탈레로가 아침도 준비해 준다. 이젯밤, 우리의 크레덴시알을 가져가며 내일 아침에는 8시 이후에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했다. 그전에는 안 된다고 했는데, 아침이 되어보니 그 뜻을 알겠다. 8시 전에는 추워서 움직일 엄두도 안 나고, 산이다 보니 어두워서 그랬던 것이다.
"왜 우리의 크레덴시알을 가져가는 거지?" 하는 나의 질문에, "도네이션(donation, 기부) 하기 전에는 안 보내주겠다는 거겠지."가 이베타의 대답이었다. 이베타의 이런 속물 같은 느낌이 싫지 않다. 아니, 나는 그녀의 이런 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났더니 양치를 하라며 생수를 한 병씩 준다. 엉? 뒷문 밖에 있던 저장탱크의 물로는 양치를 하면 안 되는 것이었어? 나는 어제 그 물로 얼마나 꼼꼼히 닦았던가! 몸속에 세균들이 돌아다닐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물로 닦아낸 겨드랑이에도 뭔가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오늘 아침에 보니 물 저장탱크는 물이끼가 가득 끼어 있다. 이젯밤에는 저 물로 상쾌하게 씻었는데, 밝은 아침에 보이는 저 저분함에 뜨악해진다. 이것은 원효의 해골바가지 물이 아닌가. 아, 몰라. 설마 죽기야 하겠냐.
만하린에서부터는 한동안 산길이다. 경연은 이런 길을 만나자 아주 신이 났다. 퐁퐁 날아다닌다. 나도 사실 경사가 그다지 높지만 않다면 너무 평평하여 지루한 길보다 이런 길이 수월했다.
큰 밤나무가 있는 길도 지난다. 나무가 얼마나 인상적인지 모른다. 큰 나무들은 그냥 감동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나무들은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능력이 시원찮단다. 그래서 유럽의 숲을 늙었다고 한단다.
산길을 내려오다 처음으로 만나는 마을이 엘 아세보(El Acebo)인데 여기서부터는 집들의 풍경이 달라진다. 지붕 색깔이 검게 변한다. 양식도 다르다. 집들은 대부분 2층인데, 2층에 나무로 베란다를 낸 형태의 집들이 많다. 어떤 집은 외부에서 2층 베란다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1층 집과 2층 집이 독립적 가구를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집도 있다. 어디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식생도 매우 달라져있다. 나무가 없고 건조해 보이던 고원지대가 끝나고, 이제는 나무가 많고 촉촉한 땅으로 들어선 것 같다. 이제 길에 그늘도 많다.
물리나세카(Molinaseca)에 접어들자 마을 입구에 큰 성당이 하나 있다. 성당 문이 열렸으면 나는 들어가 기도를 한다.
'하늘님, 제게도..........'
기도를 하고 나와 걸어가며 성당의 모양을 멀리서 한 번 더 볼 거라고 뒤돌아봤더니 성당 근처에서 이베타가
쉬며 과일을 먹고 있다. 나는 이베타와 같이 걷게 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못 본 척한다. 그녀는 말이 너무 많다. 그녀의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그걸 알아듣겠다고 신경을 바짝 세우고 걷는 것이 힘이 들기도 한다. 그녀와 좀 떨어졌다 싶을 만큼 왔을 때, 마을로 진입하는 예쁜 다리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과일 하나 부셔먹었다. 걸음이 빠른 이베타가 지나가며 인사한다. 그녀가 더 멀리 가도록 또 한참을 앉아있었다.
오늘의 목적지 폰페라다(Ponferrada)에 들어섰다. 현금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페라다에서 시티은행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을 입구에 딱 자리한 인포메이션에 들어가 시티은행이 있는지 물어본다. 없단다. 산티아고 전까지는 폰페라다가 제일 큰 도시란다. 그러니 산티아고까지 가야 한다는 소리다. 레온에서 찾았어야 했는데.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한국인들이 들었는데 같이 쓰면 편하지 않겠냐면서 오스피탈레로가 지하로 안내한다. 큰 지하 공간에 칸막이도 없이 낡은 2층 침대가 가득 놓여 있다. 곰팡내가 날 것 같은 벽면과 시원하지만 축축할 것 같은 지하의 이 공기가 단번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반해 걷고 있는 것이기도 하거늘. 물론, 햇볕을 두려워도 해서 손수건으로 열심히 얼굴에 그늘 막을 치고 다니긴 한다. 그가 말한 한국인들은 내가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대안학교 팀들이었다. D팀과 E팀이라고 칭하겠다.
"노, 노, 위층에는 자리가 없을까?"
'그렇다면 할 수 없지'하는 표정으로 위층에 방을 내준다. 네 명이 한방을 쓴다. 이런 멋지구려함이! 한 공간을 수십 명이 쓰도록 된 곳보다 작은 공간을 소수의 사람이 쓰도록 된 알베르게가 일반적으로 더 좋다고 여겨진다.
어제 씻지 못했으니, 오늘은 씻는 일이 제일 급하다. 한번 씻어도 깔끔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못 씻은 것까지 합해 두 번을 씻었더니 이제야 시원함이 느껴진다. 정말 상쾌하고 좋았다. 이제 어제 밀린 빨래를 할 차례다. 빨래터에서 허술해 보이는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잘 붙이는 이런 치들이 부럽다. (그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 만나게 된다.)
주방을 이리저리 뒤져보니 멀쩡한 간장이 한 병 보인다. 앗싸! 저걸 넣고 돼지 불고기를 헤먹으리. 경연과 광주 청년을 꼬드겨 한국 음식을 해 먹기로 한다. 경연이 고추장이 있다고 하여 '고추장 불고기 주물럭'으로 메뉴를 정한다. 저녁을 해 먹자면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야 할 텐데 어느새 경연과 광주 청년이 보이질 않는다. 나 혼자라도 장을 보러 가야겠다. 그러다 보면 오겠지.
이베타는 파스타를 요리했는데 같이 먹지 않겠냐고 한다. '경연과 한국음식 해 먹자는 약속을 괜히 했구나.' 잠깐 후회가 된다. 수고스럽지 않고도 저녁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다. 고맙지만 한국음식 해 먹기로 약속했다며 거절을 한다. 그러고 나가는데 막 도착한 맛달레나가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받으며 알베르게에 등록하는 것이 보인다. '이베타가 막 파스타 요리를 했는데, 나보고 같이 먹자고 했어, 나는 선약이
있어서 막 거절하고 나오는 길이니, 너 가서 먹으렴.'하고 둘을 주선해 주고 장을 보러 갔다.
장 보러 나가는 길에 바에 앉아 있는 경연과 광주청년을 만난다. 바에서 처음 만난 캐나다 부인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보고도 앉아 맥주 한잔하란다. 슈퍼마켓은 이거 한잔 마시고 가도 늦지 않다면서. 그래도 되겠느냐 했더니 캐나다 부인이 흔쾌히 앉으라 한다. (나는 이 여인 때문에 밤잠을 설치게 되고, 우울해진다.)
슈퍼마켓에서 아침거리도 사자며 경연이 피자를 담았다. 아침으로 별로 피자를 먹고 싶지 않았지만, 경연이 담으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떠먹는 요거트도 담는다. 저녁을 해 먹기로 한 것이 사 먹는 것만큼이나 비용이 소요되어 나는 좀 마땅찮았다. 이 저녁은 만하린에서 옷을 빌려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내가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명분을 붙인 것이어서 경연의 장보기 값도 내가 계산할 것이었다. 경연이 한국요리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저녁을 대접받은 것으로 하겠다며 비용은 분담하겠단다. "아니에요, 아니에요."가 평소 내 반응이 될 것이지만, '에이, 어쩌지?' 하면서 비용을 받았다.
장 봐온 재료로 저녁 준비를 한다. 아, 그런데, 내가 찜해뒀던 간장이 없다. 대안학교 팀이 그새 간장을 다 써버린 것이다. 할 수 없다. 착한 광주청년을 시켜 다시 한번 슈퍼마켓에 갔다 오라고 한다.
대안학교 팀은 돼지 삼겹살을 15인분 이상 굽느라 부엌 가득 연기를 내가며 수 시간째 부엌을 점령하고 있다.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자니, 이베타가 냄비를 비워야 하니 자기가 요리한 남은 파스타를 좀 먹으란다. 나는 배가 고팠던 차라 먹겠다고 한다. 한 접시 가득 담아 광주청년과 나눠 먹었다. 이베타가 음식 솜씨가 좀 괜찮았다. 매운 파스타여서 맛이 참으로 깔끔했다.
쌀을 씻어 불리고, 고기를 자르고 재워두고 하느라 시간이 엄청 걸렸다. 한국음식이 다되면 맛 보여주겠다 했더니, 이베타와 맛달레나가 오랫동안 목 빼고 기다렸다.
이제 요리가 끝나고 테이블에 세팅만 하면 된다. 두 남자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이 두 남자는 한국에서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뭐가 필요한지를 몰라했다. 나는 이런 남자들을 싫어하지.
싼 것으로 골랐는데, 포도주가 기똥차게 맛있다. 이베타도 이거 뭔 포도주인데 이렇게 맛있냐며 연신 받아 마신다. 맛달레나는 고추장불고기가 매웠던지 한 입만 먹고 말았는데, 이베타는 입맛에 잘 맞는지 가지도 않고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한국음식에 욕심을 내며 잘 먹어주는 이베타가 맘에 들었다. 이베타는 전혀 맵지 않다고 했다.
이베타는 내 발의 물집을 보더니 치료해 주겠단다. 자기 집안이 다 의사 집안이라 보고 배운 것이 있다면서. 실과 바늘을 가져오더니 물집부터 터트리잖다.
"무슨 색 실로 꿰어주랴?"
우리는 이 말이 뭐 그리 우스웠을까. 다들 배꼽을 잡았다. 색깔실을 물집 속에 꿰어 넣고는 소독약을 흠씬 쏟아붓는다. 하얀 붕대로 새끼발가락을 감싸는데, 이건 뭐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이 아니라, 새끼발가락이 부러진 수준이다. 그녀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붕대 때문에 우리는 또 한 번 눈물 나게 웃었다.
맛난 포도주 탓이었나? 너무 웃다 보니 한 냄비의 밥을 남김없이 먹고도 배가 부른 지 모르겠다. 사실, 광주청년의 식욕이 대단하여 나는 별로 많이 못 먹기도 했다.
경연이 쥬느비에브가 곧 프랑스로 돌아갈 거란 소식을 전한다. 쥬느비에브와 이별주를 한잔 할까 했지만 프랑스인들이 합류한다는 소식에 경연과 나는 다음을 기약한다. 프랑스어 속에서는 정말 불편하단 말이지. 아직 하루 이틀 더 남았으니 또 만나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