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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하 Jan 07. 2022

이별 인사

  인력사무소 앞이다. 

낯선 이방인들이 차가운 새벽 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삶의 허상들이 안타깝다. 그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속풀이를 한다. 어두운 거리는 온통 각자만의 언어들뿐이다. 

  오늘은 로마가 오랜만에 일자리를 찾은 것 같다. 멀리서 누군가 차문을 열고 로마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해가 뜨기 전에 모두 오늘의 일터로 떠나야 할 텐데…….'

인력사무소 안의 전기난로도 속이 타는지 저 혼자 새빨갛게 타들어 가고 있다.

  어느 어머니의 눈물 같은 아들들이여! 부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길 두 손 모아 소망해본다. 

  인력 사무소를 지나간다. 

  폐지(廢紙) 리어카 할아버지의 집 앞이다. 

할아버지는 높이 쌓아 둔 폐지를 치워 가면서 오늘도 대문을 힘겹게 연다. 아마도 할아버지 집은 도둑이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폐지에 둘러싸인 대문을 열 수 없어서. 

  촐랑이는 할아버지네 강아지다. 차도 무서워하지 않고 문만 열리면 길가로 달려 나와서 내가 지은 이름이다. 느릿느릿한 할아버지와 천방지축으로 촐랑거리는 아기 강아지의 어울릴 듯 안 어울리는 환상의 콤비는 오늘도 분주하게 골목길을 누빈다. 

  '할아버지! 엊그제 내린 비로 모아두신 종이가 젖어 마음 아팠어요. 건강하시고 촐랑이의 재롱 속에 오늘 하루도 행복하셔요.' 

  할아버지 집 앞을 지나간다.

  우유 대리점 앞이다. 사장님이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벌써 우유 상자가 모두 실렸다. ‘부르릉부르릉’ 우유 배달 차에 시동이 걸린다. 새하얀 우유를 기다리는 가정마다, 가게마다 건강한 아침이 함께 배달될 것이다. 

  '우유사장님! 따뜻한 우유 한 잔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네요. 깊은 불경기로 시름이 많으시죠. 조금만, 조금만 더 참고 견뎌보시게요.' 오는 봄 사이로 기쁜 소식들을 기다려 본다. 

  우유 대리점을 지나간다.

  제과점 앞이다. 

가게 앞에서 맨손으로 운동을 하는 사장님과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유난히도 작은 키에 마음이 간다. 저 작은 체구가 감당해야 했을 어쩌지 못할 삶의 무게에 가슴이 저려온다. 제과점 사장님은 부족한 운동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온종일 새하얀 밀가루를 치댈 것이다. 

  '사장님! 답답한 조리실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사장님의 수많은 분신이 오늘도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네요.' 어느 누구도 배고프지 않는 세상이 올 수 있기를 바래어본다. 

  제과점 앞을 지나간다.

  저 멀리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힘껏 밀며 청소 아저씨가 달려온다.

    “안녕하셔요. 좋은 아침입니다.”

 머리에 반짝이는 랜턴 모자를 쓰고 오늘도 아저씨는 좁은 골목길을 숨 가쁘게 내달린다.

  '아저씨! 집안의 가장으로 흘리시는 아저씨의 땀 냄새가 어느 귀한 향수보다 곱네요.' 

오늘도 어둠을 비추어주는 저 랜턴 불빛처럼 환하게 살아 내어지는 삶이기를 소망해본다. 

  아저씨를 지나쳐간다.

  건물 청소 언니를 만난다.

  “안녕하셔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자네도 좋은 아침!” 

하며 인사해 준다. 

  얼마 전 동생 장례식을 다녀왔던 언니는 요즘 얼굴이 많이 상했다. 집이 가까워 다닌다면서 벌써 건물청소 일을 한 지 삼년이 넘었다고 한다. 모자를 벗으면 희끗거리는 흰머리마저 정겹다. 

  '언니! 늘 따뜻한 말도 해주시고 가끔 건네주고 가시던 찰밥은 정말 맛있었어요. 감사해요. '

  청소 언니 곁을 지나간다.

  삼성이발관 앞이다. 

오늘도 같은 시간에 이발관 문을 여셨다. 가끔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 묵례 정도는 나눈다. 

  '아저씨!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머리를 다듬어주는 좋은 일 오래도록 하시면서 건강하셔요. 늘 같은 시간에 문을 열어 주셔서 제 마음이 평안했어요.' 

  이발관 앞을 지나간다. 

  동네 슈퍼 앞이다. 

할머니는 둘째 손녀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내고 목욕탕에 가신다. 새벽에는 할머니가 문을 열고 오전에는 딸이 가게에 나와 있다. 요즘은 겨울방학이라 큰손녀가 엄마 옆에 바짝 붙어있다. 

  '할머니! 단란하고 예쁜 가족들 모두 모두 행복하셔요.' 

  동네 슈퍼 앞을 지나간다. 

  드디어 우리 집이 보인다.

나는 치과병원에서 청소 일을 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두시간 정도 병원 청소를 하면 된다.하지만 얼마 전 어깨충돌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일을 계속하는 건 무리다. 결국 나의 우렁각시 놀이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새벽길을 혼자 걸었다. 캄캄한 어스름 사이로 많은 이웃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주변의 익숙한 모습이다. 

  그러나 해뜨기 전과 해가 뜬 후의 모습은 참 많이 달랐다. 나는 스스로 참 열심히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변함없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며 아직 내 갈 길은 한참 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직 나 혼자만의 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른 시간에도 내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늘 함께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삶이 있었다. 고마운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나와 함께 있어 주어 참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며 혼자만의 작별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이별 인사를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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