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외삼촌의 전화를 끊고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마음은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은 할머니와 나의 거리만큼이나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박 육순’이란 외할머니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어려서는 할머니가 이름인 줄 알았다. 왜? 한 번도 할머니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낯 설기만한 ‘박 육순’이란 이름 앞에 곱게 웃고 계신 사진을 보고서야 내 할머니임을 깨닫는다.
“할머니! 은하 왔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처음으로 할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외할머니 나이 스물여덟 살에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큰 딸이던 우리 엄마는 8살이었고 막내 삼촌은 돌이 안 지났다고 했다. 어린 자식 넷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스물여덟 살의 할머니에게 산다는 것은 여름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메마른 땅처럼 거칠고 척박했으리라. 나는 할머니에게
“그 나이면 시집을 가도 몇 번은 더 갔겠네.” 하며 왜 혼자서 그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어린 것들을 두고 내가 간들 어딜 갔었겠냐!” 하시며 조용히 미소만 머금으셨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셨던 할머니는 십 년 후에 엄마를 시집보내셨다. 그때 기분을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 자식들 데리고 여자 혼자 살던 집에 남자가 들어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단다.” 하시며 큰사위에게 품었던 많은 기대감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사위였을 우리 아버지에 대한 실망은 평생 할머니의 짐이 되었을 것이다. 순탄치 못했던 엄마의 결혼생활은 외할머니에게는 산 너머의 산 같은 말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세 살 때부터 함께 살았다. 몸이 약한 내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바쁘셨던 엄마한테 떨어져 할머니가 키워주시기로 한 것 같다. 아마도 큰 딸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배려였을 것이다. 엄마와 떨어져 울기만 하던 어린 손녀를 등에 업고 달래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린 내가 늘 만지작거렸던 것은 할머니의 엄지손가락 옆에 하나 더 있던 엄지손가락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엄지손가락이 두 개인 육 손이었다. 장난기가 많았던 아버지는 할머니에게는 육순이, 엄마에게는 칠순이, 나는 팔순이라며 별명을 지어서 놀려대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장모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버르장머리 하나도 없는 사위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하며 웃으셨다. 할머니의 손이 육 손이어서 이름도 육순이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손이 몇 개였든 한 번도 그 손을 감추려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꿋꿋하고 기품 있으셨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오 년 정도였다. 나는 입학통지서가 나오면서 광주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결혼한 외삼촌들을 따라 시골 재산을 처분하고 서울로 떠나셨다. 할머니도 나도 몇 년 동안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나에게는 이름만 할머니였지 엄마 같은 분이셨기에 해만 지면 할머니를 부르며 울어서 엄마 가슴을 아프게 했다.
또 할머니는 어린 새처럼 품에 안고 키웠던 나를 떠나보내고 마음고생이 많으셨다. 방학이 되면 다시 할머니 품으로 달려갔지만 ‘키워준 정은 없다’는 옛말처럼 난 점점 할머니를 잊어갔고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몸이 약한 엄마보다 더 건강하셨던 할머니는 86살의 나이로 소천 하셨다. 선산에 계시던 할아버지 곁에 육십여 년 만에 조용히 몸을 누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고단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 밑바닥이 먹먹하다 못해 아려왔다.
“할머니!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픈 할머니를 뵈러 가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셔요. 말없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 그립습니다.”
인생의 귀한 것을 깨닫기에는 늘 한 박자가 늦어지는 미련한 것이 또한 인생이리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할머니 은혜에 감사하며 나의 때늦은 첫정을 노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