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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Jul 11. 2023

엄마는 왜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3) 이서수 <엄마를 절에 버리러>

'아는 마음'이 있다. 책을 읽다가 종종 발견한다. 이러이러했다고 쓴 부분을 읽고 그 마음 알지, 하게 될 때. 뭔지 알아서 웃음이 나올 때도 있고 뭔지 알아서 코가 찡할 때도 있다.




엄마를 울게 만드는 엄마 인생의 모든 것을 내다버렸으면 싶었다. 그게 나일지라도.

이서수, <엄마를 절에 버리러> 중에서




엄마의 인생을 괴롭게 하는 것 중에 내가 포함된다면 나마저도 내다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난 아닌 것 같았으니까. 아니지 않았다한들 이제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엄마를 떠나보내는 날 찾아온, 엄마의 오랜 계모임 친구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고 "너네 엄마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잊으면 안된다"했다는 것.
엄마는 모두의 눈에 보이게 나를 사랑했다. 유난스럽게 아꼈다.


엄마는 왜 버리지 못할까, 그 생각은 많이 했다. 무능하고 게으른 아빠를 왜 버리지 못할까. 저 낡은 서랍장을 왜 버리지 못할까. 서랍장 안의 묵을만큼 묵은 옷들을 왜 버리지 못할까.


돌이켜보면 엄마는 엄마의 곁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같다. 그것 중 하나라도 버리면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것이라 여겼던 것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말이다, 엄마는 그 모든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대가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있었다.
이젠 좀 지겹고 답답한 이야기. 도대체가 이 나라의 엄마들은 왜 늘 그런 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돈 많은 가족. 돈 많은.

그 단순하고 편협한 수식어를 원한다는 게 웃기면서도 슬펐다. 그러나 내 마음을 확인한 이상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 다시 엄마와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

이서수, <엄마를 절에 버리러> 중에서




더는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엄마가 모든 걸 내버려두는 세상을 꿈꿔본다. 나는 갖지 않기로 결심한 그 이름, 또 부를 일도 없는 그 이름이 이제 그만 눈물겨웠으면 한다. 그렇게 해봤자 남는 게 '이름만 불러도 울컥하는' 것이라면 굳이, 그렇게 해봤자 얻는 게 딸들의 애증과 죄책감이라면 굳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엄마를 놓친 것인지 엄마가 나를 놓은 것인지. 그러나 분명한 건 엄마를 괴롭게 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길 소원하며 보낸 시절이 나의 사춘기였고, 엄마를 괴롭게 한 모든 것들에 포함된다면 나는 놓아질 준비가 되어있다. 이젠 영영 준비에서 그치겠지만, 그 준비를 거두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나 엄마를 사랑했다고. 그 사랑은 나의 의무였고 권리였고 억지이자 의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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