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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Oct 22. 2023

한 손엔 고통을, 한 손엔 희열을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뮤지컬④ <프리다>


무대 위 김소향을 보다보면 배역을 넘어 배우가 궁금해진다. 아무리 배우의 능력 중 가장 큰 게 감정의 표현이라지만, 빈 방에서 쌀이나 금이 생기지 않듯 빈 사람에게서 슬픔과 기쁨이 절로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럼 대체 저 배우의 안엔 어떤 것이 있길래 저만큼의 사랑을, 저만큼의 고통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것일까. 마치 매순간이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또 이따금씩은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이라도 해버릴 것처럼.

아제르바이잔에 가면 땅 속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로 1,000년동안 한 순간도 꺼진 적 없는 불꽃 ‘야나르다흐’가 있다. 무대 위의 시간을 사는 배우라면 그 불꽃의 모습을 동경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만난 무대 위 김소향의 숱한 순간들은 늘 뜨거웠다. 뜨겁게 울고 있었고,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고, 뜨겁게 아름다웠다. 바람의 모양에 따라 시시각각 모양을 바꿀 뿐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사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음!



얄궂은 취향인지, 내가 평소 관극보다 감탄함에 하루이틀을 더 쓰게 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인물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이야기다. 배우도 관객도 감정 소모가 큰 극. 날카로운 생의 바람, 그에 몰려 벼랑 끝에 매달린 인물, 폭발하는 감정, 뛰어내리거나 기어오르거나.

프리다는 생의 벼랑에서 어떻게 했나. 부서진 척추와 썩어가는 다리로 내내 매달려있던 그는, 결국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 모습은 처절하긴커녕, 바다를 만난 소년의 여름날과 닮아있다. 그럼 그게 추락인가? 나는 프리다의 마지막을 ‘끝내 솟아오름’이라 여기고 싶다.

내가 뽑은 명장면은, 유산의 고통을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자신의 세 운명과 추는 춤이다. 지난 시즌까지 통틀어 10번 가까이 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지없이 그 장면이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불꽃 같이 타오르는 프리다와, 프리다의 운명들.

그 장면에서 무당의 굿판을 연상한 건 나만일까. 어떤 회차에선 아이가 하늘로 무사히 올라가길 바라는 씻김굿이었고, 또 어떤 회차에선 고통의 신을 끌어안는 한 여인의 내림굿이었다. 또 다른 회차에선 칼날 같은 운명을 외면하는 몸부림, 눌림굿으로도 느껴졌다. 회차마다 다른 느낌을 주었으나 매번 같은 점도 있었는데, 그들의 춤은 늘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내뿜었다는 것이다.
결코 다르지 않은 고통과 희열. 그게 이 극을 완성하는 단단한 매듭이 아닐까.

2시간 가까이, 프리다의 상황과 감정은 가장 높게 치솟았다 낮게 처박혀 구르길 반복한다. 너울성파도가 극심해 무거운 닻을 내린 배들도 뒤집힐 정도. 그 파도에 휩싸인 게 프리다라면 레플레하, 데스티노, 메모리아는 프리다를 싣고 바다에 오른 배다. 배는 파도를 타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즉, 삶의 불가분인 사랑과 죽음과 기억 그 자체.

이들 역시 서로 다르지 않다. 프리다에게 사랑은 곧 종교였기에 희망이자 순교였고, 죽음은 낭떠러지이자 탈출구였다. 기억은 삶을 나아가게 하는, 위태로우나 분명히 그곳에 있는 외줄이었다.

고통에 스토킹 당하던 인생도 끝까지 버텨 이름을 남겼는데, 나는 군말 말고 열심히 살아야지! 라 느꼈냐 묻는다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얻은 위안은 내가 느낀 전부라 할 수 없고, 내 느낌의 결론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를 외치는 용기에 무한한 사랑이 남았을 뿐이다. 극이 이어지는 동안 느낀 위로, 힘, 열정과 같은 다른 느낌들은 프리다와 세 운명을 향한 사랑의 범람에 묻혀버렸다. 그토록, 뮤지컬 <프리다>는 사랑스럽고 어여쁘게 내게 남았다.

상처로 완전하게 아름다운 나의 벌새, 나의 수박, 나의 샴페인.


삶의 싱크홀에 빠져 울적함에 순응해갈 때, 뮤지컬 <프리다>는 한 줄기 빛이라기 보다 그 빛을 향한 사다리로 내게 내려왔다. 그 사다리를 차근차근, 때로는 꾸역꾸역 올라가다 보면 이 극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줄 것이다. 목 마를 때 물 찾듯 서러울 때 “멋진 인생따윈 없어도 돼, 화려한 조명도 필요없어, 하지만 조그만 숨이 남아 있다면” 중얼거리다보면 다음 시즌이 찾아오겠지. 그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 거다. 이 극이 나의 ‘메모리아’가 되어줄 것이다.





이 극을 칭찬하고 토닥이고 응원하고 앞으로의 시즌도 쭉 함께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여성인 배우 4명이 자신들의 역량으로 무대를 꽉 채우고, 관객들의 감동이 객석을 차고넘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 숨어있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여성 스태프들과(마지막까지 보이지 않는 이들도 물론), 무엇보다 추정화라는 이 거친 항해의 선장까지, 모두 차고 넘치게 멋진 여성이라 박수를 열댓 번이라도 더 칠 수밖에.

단언컨대 회차마다 만났던 각기 다른 4명의 배우들이, 그 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멋진 배우임에 그 어떤 의심도 없었다. 이 말을 꼭! 정식 초연과 재연으로 만났던 김소향, 전수미, 리사, 정영아, 임정희, 이아름솔, 최서연, 허혜진, 박시인, 황우림 배우에게 전하고 싶다.

그러한 인생이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당신이기에, 가장 뜨거운 응원과 사랑이 될 이야기. 삼연 때는 뮤지컬 <프리다>의 멋짐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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