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다를지라도, 마음은 진리를 향할 수 있다
1. 시작하며 – 간화선을 묻다
간화선(看話禪)은 선종(禪宗)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화두(話頭)란 깨달음을 향해 던져진 의문이며, 말이 아닌 의식의 문 앞에 놓인 질문이다. 간화선은 그 질문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껴안고, 그것을 뚫고 들어가 마음의 본성을 직관하려는 수행이다.
많은 사람들은 간화선을 고요한 산사에서 앉아 정좌한 채 수행하는 방식으로만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간화선은 단지 ‘앉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화두’에 대한 간절한 몰입에 있다. 이는 몸이 아닌 마음의 영역이기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장애인도 간화선을 할 수 있는가?”
2. 간화선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한다
선(禪)은 늘 몸과 마음의 일치를 말해왔다. 그러나 간화선의 진면목은 그 '몸'이 꼭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몸 안에서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마음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우리가 움직일 수 없다고 해서, 참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리 꼬기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의자에 앉아 있거나, 누운 채 정신을 집중할 수 없다고 해서 수행이 아닌 것은 아니다. 간화선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조정되어야 하며, 그 가능성은 열린 채 있다. 장애인에게도 분명 그 문은 열려 있다.
3. 장애란 무엇인가 – 수행을 막는가, 아니면 새로운 문인가
장애란 일반적인 기능에서 벗어난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오랫동안 그것을 결핍으로 보아왔다. 이 시선은 종종 수행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앉을 수 없다면?", "절할 수 없다면?" 등의 물음 속에는 장애가 '수행 불가능'의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간화선은 그 프레임을 벗어난다.
간화선은 오히려 그러한 불완전함 속에서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바깥 세계로부터의 자극이 줄어들 때, 마음은 더욱 내면을 향하게 된다. 그 속에서 '화두'는 외면적 언어가 아닌, 존재의 진실로 다시 태어난다.
4. 몸의 한계를 넘어서는 집중력
누군가는 침상에 누워 온몸이 굳은 채, 눈동자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에는 세계가 있고, 그 속에는 여전히 의식이 있다. 간화선은 그 의식의 불빛을 찾는 작업이다. 앉을 수 없는 사람은 누운 채,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마음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은 내면의 걸음을 통해 수행한다.
집중은 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의 제한은 집중을 위한 문이 될 수 있다. 장애로 인해 혼란스러운 감각이 정리되기 시작하면, 오히려 평소보다 더 섬세하게 자기 내면의 흐름에 주목할 수 있다.
5. 화두, 그리고 그 질문의 힘
간화선의 핵심은 '화두'다. 화두는 질문이며, 의문이고, 풀리지 않는 하나의 매듭이다. "이뭣고?", "부처가 무엇인가?", "토끼뿔?"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간절한 탐색이다.
장애인에게 던져진 화두는 더욱 간절하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 몸으로도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이러한 실존적 질문은 간화선이 요구하는 '절박한 의심'과 맞닿아 있다.
6. 수행의 자세는 ‘몸’이 아니라 ‘간절함’이다
많은 스님들이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간화선은 ‘자세’보다 ‘의심’이 중요하다.
정확한 좌선 자세는 도움은 되지만 필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화두에 자신을 내맡기고, 온 존재를 던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장애인은 자신의 한계를 더 절절히 알고 있다. 그만큼 간절함도 더 크다. 수행의 문턱이 높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 간절함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 간절함이야말로 간화선의 본질이다.
7. 수행은 공평해야 한다
장애인도 그 길 위에 있다 불교는 평등을 말한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고, 누구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 수행 공동체는 종종 장애인을 배제한다. 이동이 어렵고, 단체수행에 참여하기 힘들며, 포교 방식 역시 비장애인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간화선은 이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수행이다. 고요한 방 안, 침대 위, 병실 한쪽에서도 가능한 수행. 장애인도 그 길 위에 있으며, 간화선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8. 일상의 순간에 화두를 들다
장애인의 일상은 반복과 인내의 연속이다. 자가 이동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일이 하루의 큰 수행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순간에도 "이뭣고"를 들 수 있다. 숨이 가빠질 때,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마음속에 화두를 품는 것이다.
그 어떤 정형화된 시간과 장소가 아니어도, 간화선은 가능하다. 오히려 일상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문득 피어나는 한 줄기 의심, 그것이 간화선의 시작이다.
9. 내가 겪은 화두 _ 장애 이후의 간절한 물음
나는 어느 날 쓰러졌고, 그 이후 다시 걷지 못했다. 처음엔 고통과 원망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질문이 있었다.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어느 순간 화두가 되었다.
내 몸은 멈췄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움직일 수 없는 몸속에서, 나는 그 화두와 함께 호흡했다. 때론 눈물로, 때론 침묵으로 그 질문을 품었다. 간화선은 나에게 ‘가능성’이 아닌 ‘현실’이었다.
10. 장애를 수행의 장애로 보지 않기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간화선을 못한다고 말하는 건, 수행의 본질을 오해하는 일이다. 수행은 '되면 좋고 안 돼도 괜찮은'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응답이다.
장애인이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수행의 문턱을 높여놓은 것이다. 간화선은 이러한 벽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도, 마음속 진리를 향한 길은 열려 있다.
11. 끝맺으며
길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간화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신체의 조건을 넘어서서, 마음의 결기로 열리는 길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길 위에 선다면, 그 자체로 이미 간화선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우리는 장애인을 위해 간화선을 낮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간화선 자체가 이미 ‘장애와 상관없이’ 가능하도록 열려 있다. 다만, 그 가능성을 믿고, 함께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삶은 늘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더욱 진실해질 수 있다. 간화선은 그 진실을 향한 길이며, 그 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몸이 다를지라도, 마음은 진리를 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