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달이 머무는 궁, 요석의 눈물

갇힌 새의 정원과 금기를 깨는 노랫소리

by 현루

달이 머무는 궁, 요석(瑤石)의 눈물

​신라의 심장부, 서라벌의 밤은 깊어갈수록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금성(金城)의 화려한 전각들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요석궁의 담벼락 안쪽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에 잠겨 있었다.

그 적막의 한복판에 요석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가장 아끼는 딸이자, 서라벌의 모든 사내가 꿈속에서라도 한 번쯤 마주치길 갈망하는 절세의 가인(미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비단옷의 광택 아래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 같은 고독이 짙게 눌러앉아 있었다.
​요석은 이미 한 번의 이별을 겪은 여인이었다. 남편이었던 김흠운이 백제와의 전쟁터에서 장렬히 전사한 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청춘과부'라는 서글픈 꼬리표와 부왕이 마련해 준 요석궁이라는 이름의 창살 없는 감옥뿐이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여섯. 꽃이 가장 붉게 피어나 향기를 사방에 흩뿌려야 할 나이에, 그녀는 지는 낙엽을 보며 자신의 생(生)도 이대로 저물어갈 것이라 믿으며 매일을 견뎠다.
“상궁, 오늘 달이 참으로 밝구나.

저 달은 성벽 너머 저잣거리의 가난한 초가집도 비추고, 이름 모를 산사의 퇴락한 기와 위에도 공평하게 내려앉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나만 이 좁은 뜰에 갇혀 달빛의 조각이나 줍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요석의 탄식에 곁을 지키던 노상궁은 대답 대신 촛불의 심지를 돋우었다.

공주의 외로움은 이 궁궐의 무거운 돌덩이들조차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요석은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그녀는 문득 이 화려한 세상이 자신에게는 단 한 조각의 진심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허상처럼 느껴졌다.

궁녀들의 영혼 없는 아첨, 귀족들의 탐욕 어린 시선, 그리고 죽은 남편의 위패 앞에 향을 피우며 보내야 하는 의무적인 시간들. 요석은 그 모든 가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담장은 너무도 높았고, 왕실의 법도는 숨이 막힐 듯 견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라벌의 나른한 오후를 깨뜨리는 기이한 노랫소리가 요석궁의 높은 담장을 넘어 요석의 귀에 닿았다.

그것은 우아한 아악(雅樂)도 아니었고, 서정적인 향가도 아니었다.

거칠고 투박하며, 어딘가 나사가 풀린 듯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기묘한 울림이 있는 사내의 목청이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노랫소리는 저잣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더니 이내 왕궁 앞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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