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시간이 갑자기 느려지는 순간

by 현루

예전에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자주 느꼈습니다.

하루가 시작되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고,

한 주가 지나면 또 다른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지나고, 계절도 조용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의 시간은 마치 앞에서 누군가가 끌고 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 바빴고, 가끔은 시간에게 조금만 천천히 가 달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많고,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아서 하루가 짧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갑자기 느려지는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빨리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고,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시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몸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채 조용히 하루를 맞이하는 순간.

그 짧은 시간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집니다.

마치 하루가 그곳에서 잠시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시간이 느려지는 또 다른 순간은 창밖을 바라볼 때입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나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바람이 지나가며 나뭇잎을 조금 흔들고, 구름이 아주 느리게 움직입니다.
그런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느려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풍경을 오래 바라볼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늘 어딘가로 가야 했고,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밖의 풍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끔 그 풍경 앞에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속도가 조금 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분명 같은 하루인데도 이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집니다.

마치 하루 속에 숨겨져 있던 작은 공간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은 또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을 때입니다.
사람은 늘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 시간들도 물론 소중한 시간이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춘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합니다.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되기도 하고,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의 흐름이 아주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우리는 너무 빠르게 살아가느라 시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늘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지만, 우리의 마음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잠시 멈추어 서면 시간도 함께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저는 그런 순간들을 가끔 경험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하루 속에서, 갑자기 시간이 조금 느려지는 순간들.

그 순간들은 아주 짧게 지나가기도 하지만, 마음에는 오래 남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이 하루를 제대로 느끼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 시간을 천천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그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여전히 앞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흐름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흐름을 조용히 바라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갑자기 느려지는 그 순간을
잠시라도 느껴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끔 찾아오는 그런 느린 순간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