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有無)의 타파
인간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오래된 틀은 '존재(有)'와 '비존재(無)'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있다'라고 규정하고, 보이지 않거나 사라진 것을 '없다'라고 단정한다.
이 단순한 이분법은 우리의 언어와 철학, 그리고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뿌리가 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이 당연해 보이는 상식이 사실은 진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일갈한다.
우리는 '있는 것'에 집착한다.
내 몸, 내 소유물, 내 지위가 영원히 '있어야 한다'라는 강박은 필연적으로 상실에 대한 공포를 낳는다.
반대로 삶의 허무를 깨달은 이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의 극단으로 치우치기도 한다. 성철 스님은 이 양극단을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이라 부르며, 이 두 가지 병통을 완전히 치료하지 않고서는 결코 깨달음의 문턱을 넘을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성철 스님이 유무를 타파하기 위해 제시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은 용수 보살의 『중론』에 등장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출(不來不出).
이 여덟 가지 부정은 우리가 현상을 파악하는 모든 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우리는 꽃이 피면 생겨났다고 하고(生),
지면 사라졌다고 한다(滅).
하지만 성철 스님의 시각에서 꽃은 인연이 모여 잠시 나타난 현상일 뿐, 그 본질이 새로 생겨나거나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다시 강물이 되듯, 우주의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꿀 뿐이다.
따라서 '태어남이 있다'라는 생각과 '죽어서 없어진다'는 생각은 모두 지엽적인 현상에 매몰된 착각이다.
이 여덟 가지 '아님(不)'을 통해 스님은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씩 해체해 나간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환상인가?
성철 스님은 이를 '가유(假有)', 즉 '잠시 거짓으로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마치 꿈속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진짜처럼 느껴져 식은땀을 흘리지만, 잠에서 깨면 흔적도 없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일상 또한 인연의 조건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꿈과 같다.
중요한 것은 이 '꿈'을 '없다'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참뜻이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공을 '빌 공(空)' 자의 의미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스님이 말하는 공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고정된 형체가 없기에 어떤 형체로든 나타날 수 있는 역동적인 상태다.
유(有)를 집착하면 탐욕에 빠지고, 무(無)에 집착하면 나태와 허무에 빠진다.
그러나 유무를 동시에 타파하여 공의 실상을 보면, 비로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진정으로 누릴 수 있고,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현재의 찰나에 온전히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유무가 타파된 자리에 나타나는 경지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한다.
'진정으로 비어 있기에 묘하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내 안의 아집과 고정관념을 텅 비웠을 때, 비로소 온 우주의 생명력이 내 안에 가득 차게 되는 원리와 같다.
백일법문의 중도 논리에 따르면, '있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우리를 고통의 윤회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타인과의 경계는 뚜렷해지고, 갈등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 '나'라는 실체가 비어 있음을 깨달을 때, 너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결국 유무를 타파하는 목적은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자비와 지혜를 깨우기 위함이다.
성철 스님이 100일 동안 강조한 가르침의 요체는 단순하다.
"양변을 버려라."
그중에서도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있다'와 '없다'라는 유무의 고개다.
이 고개를 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노예가 되거나, 방향을 잃은 방랑자로 살아가게 된다.
유무를 타파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얻었다고 교만하지 않고 잃었다고 낙담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본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이는 그 평범한 진리가, 사실은 모든 집착이 걷힌 뒤에야 드러나는 지고의 성스러운 풍경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있다'라고 믿으며 괴로워하고 있는가?
내가 붙들고 있는 그 '없음'의 허무는 혹시 또 다른 집착의 변형은 아닌가?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은 우리에게 그 팽팽한 이분법의 활시위를 놓으라고 손짓한다.
활시위를 놓는 순간, 화살은 과녁을 넘어 무한한 자유의 허공으로 날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