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를 섬기란 말이야!”

왕이 되려는 자와 왕이 될 수 없는 자

by 마혼

<마혼의 Stage & Age 11>


요즘 유행하는 MBTI를 굳이 가져와 비춰보더라도 세상을 십분법이나 이십분법으로 보고 싶은 건 사람이치. 그러나 그 MBTI조차 ‘나랑 맞는 사람’ 혹은 ‘나랑 안맞는 사람’으로만 나눠버리듯 자꾸 이분법으로만 보게 되는 건 세상이치.


그 중 하나. 그저 조용히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꼭 먼저 나서서 남들을 이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법. 전자의 경우, 어마무지한 능력을 굳이 감추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문제될 건 없는데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이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의 능력이나 성격에 집단의 운명이 걸리기 때문. 그래서 누구 말마따나 ‘성격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건 우주이치.


더 드레서 The Dresser. 로날드 하우드 작. 남아공출신이며 지금은 80이 넘은 할아버지인데 영화 ‘잠수종과 나비’, ‘피아니스트’ 등의 각본을 쓴 사람이다. 몇 안되는 그의 희곡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실제 하우드 자신이 드레서였던 경험을 살려 쓴 대본. 우리나라에서도 원로배우인 오현경선생이 늘 벼를 만큼 노회한 남자배우들이 욕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끔 노회하지 않은 배우들이 자꾸 욕심을 부리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2차대전이 한창인 1942년 겨울, 영국의 어느 시골 극장. 어제는 오셀로를 공연하고 오늘은 리어왕 공연을 준비하는 순회극단의 주연배우이자 왕처럼 군림하는 ‘경 Sir’과 그의 개인 드레서인 노만. 공연이 몇 시간 안남은 극장. 그런데 처음부터 광폭함이 무대를 덮는다. 경이 갑자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것. 노만이 뒤늦게 쫒아가보니 방금 미사일이 떨어져 연기나는 구덩이 옆에서 실제인지 연기인지 모를 행동을 하며 왕의 옷을 마구 벗어제끼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것. 노만은 억지로 경을 병원으로 모셔다놓고 일단 극장으로 향하지만, 이제는 경에게 진력이 나버린 경의 부인조차 공연을 취소하자고 한다. 그러나 노만의 대답은 No. 자기를 드레서로 뽑아준 경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명멸을 옆에서 지켜보는 안타까움에 노만은 울게 되고 다시 극장으로 모셔오려는 순간, 경이 극장으로 혼자 들어선다. 부인은 계속 경을 만류하지만 경은 막무가내. 공연을 하겠단다. 꼼짝도 않는 경. 반가운 노만만이 그와의 지난 추억을 코미디언처럼 펼쳐보이며 그를 건져올려보려고 애를 쓴다. 마치 치매걸린 엄마 앞에서 옛 추억을 역할놀이로 꾸며대는 사랑스런 아들처럼. 드디어 공연시간 임박. 한동안 말이 없던 경은 노만의 대사에 마치 머릿속 종이라도 울린 것처럼 반응한다.


노만 : 오늘 밤 꽉 찼을걸요. 모두들 경만 생각하고 경을 기다리고 있다구요.

: 정말이야? 꽉 찼다구?

노만 : 그럼요. 자, 우리 무대로 가실까요? (사이)

: (나가다 말고) 오늘 공연할 작품이 뭐지?

노만 : 리어왕입니다.


경은 다시 변덕을 부리더니 자기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을 너무도 잘 알며 사랑하는 노먼은 어떻게든 그의 변죽에 필사적으로 장단을 맞춰댄다


: 모두가 날 짓누르고 있어. 내 피가 말라가고 있다구. 난 줄 게 없어.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아.

노만 : ‘노만, 맨 앞줄에 세명만 앉아있어도 난 상관없다구. 난 그를 위해 연기할거야.’ 이러셨잖아요!


잠시 후, 분장을 시작하는 경. 하지만 왠열, 그는 오셀로의 분장을 해버린다. 오셀로는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라 얼굴에 검칠을 해야하는데 노먼이 그러고 있었던 것. 노먼이 부랴부랴 다시 경의 얼굴을 닦아내지만 이번엔 첫 대사부터 기억이 안난단다. 오늘이 227번째 리어왕 공연이라고 말하는 노먼. 다시 분장하는 경. 실제 분장실에서도 왕처럼 군림하는 경은 분장을 하며 소품을 체크하고, 배우들을 오게 해서 대사까지 점검한다.


그러나 무대에 오른 그는 ‘리어왕’의 압권이랄 수 있는 광야 장면을 연기하지만 자꾸 대사를 까먹는다. 경은 리어왕이 되려 하지만 리어왕이 경이 돼버린다. 그리고 딸의 배신인지, 세상의 배신인지 모를 조여오는 운명. 그래서일까. 간신히 공연을 마친 경은 왕의 옷을 입은 채 분장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끝내 섬김받지 못하는 왕이 된 걸까.


그리고.


1971년에 초연이 올라간 연극 ‘오텐부르크의 아모르프 Amorphe d’Ottenburg’. 프랑스의 장 끌로드 그룸베르크가 썼고 우리나라에선 1989년 올라갔다.


왕국 오텐부르크 궁에 사는 가정교사 꼽추. 그는 일찌감치 정신박약인 왕의 큰아들 아모르프를 데리고 다니며 검술과 사냥을 가르친다. 그래서 몸이 망가진 꼽추와 정신이 망가진 아모르프는 깐부가 된다. 그러나 궁엔 장애를 가진 자들이 더 있었으니 왕과 왕비. 둘은 아모르프 말고도 아들 둘, 딸 하나가 더 있지만 이들은 오직 그에게만 병적으로 집착한다.


: 당신 저 소리 들리지? 쟤가 많이 좋아졌어. 눈에 띄게 좋아졌어. (왕비 역시 아모르프의 괴기한 목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왕비 : 맞아요 여보, 잘 들려요. 정말 좋아졌어요. 기막히게 좋아졌어요.

: 그렇지? (왕비는 일손을 멈추고 입을 헤벌린 채 듣고 있다) 두고 봐. 저 녀석은 가장 뛰어난 인물이 될 거야. 모든 점에서!

왕비 :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내 새끼!


그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오면 올가즘을 느낄 정도.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라살림이 엉망일뿐더러 자꾸 늙은이나 불구만 골라 죽여지는 괴랄한 살인사건이 연일 벌어지는 중. 이를 보고하던 늙은 서기관마저 궁안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한편 이 모든 일이 곱추와 아모르프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힌 아르놀프와 아스톨프 두 아들은 아버지 왕에게 이를 알리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왕은 두 아들을 멀리 한다. 심지어 늙은이들이 없어지니 나라경제가 살아난다고 좋아하는 지경에 급기야 연회장에서 아모르프가 칼로 살인을 저질러도 이를 두둔하기 바쁜 천상계까지 시전한다. 그러던 왕 역시 결국 꼽추가 보는 앞에서 아모르프의 칼을 맞는다. 아모르프가 왕을 죽이며 한 말은 ‘아,빠’. 그렇게 꼽추는 아모르프를 사주해 왕비와 미쳐버린 여동생 등 모든 피붙이들을 죽이더니 자기 손으로 결국 아모르프의 목을 긋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건한 아들 아스톨프가 자기 나라를 치러오자 위기에 부딪힌 꼽추는 입을 제대로 놀려 문은 없고 무만 갖춘 아스톨프의 칼을 피하며 막을 내린다.


꼽추 : (무릎을 꿇고) 찌르세요, 폐하. 찌르시라니까요.

아스톨프 : 일어나...

꼽추 : 찌르십시오. 부탁입니다. 내리치십시오!

아스톨프 : 조용히 해! 이제부터 나를 섬기도록 해. 예전에 그 괴물을 섬겼듯이... 내일 할 연설문을 작성하도록. 몇 마디 정도... 국민들에게 말해줘야할 것들 말이야...

꼽추 : (아스톨프에게 달려들어 손에 입맞추려 하며) 폐하의 은덕은 하해와 같으시고...

아스톨프 : (후다닥 뒤로 물러서며) 물러서, 개색휘야. 거기 서 있어... 손대지 마... 얼른 효율적인 경제부흥계획이나 만들어와... 사촌들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고, 우리 계획에 따를 수 있게...

꼽추 : (몸을 숙여 절하며) 염려마십시오, 고귀하신 주인님. (아스톨프는 그를 두고 퇴장한다. 홀로 무대에 남은 꼽추. 짧은 순간 무대에 조명이 꺼졌다 들어오면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 꼽추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꼽추는 끝내 섬김받는 왕이 된 걸까. 왕이 되려는 자 그리고 왕이 될 수 없는 자... 결국 같은 사람 아닐까. 왕이 되려는 자는 결코 왕이 될 수 없고 왕이 될 수 없는 자는 꼭 왕이 되고자 하기 때문.


자, 그럼 당신은? 왕이 되려는가? 될 수 없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굳이 왕이 안되고도 왕처럼 될텐가? 크흣, 목숨 걸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면 제대로 된 왕이라도 좀 뽑아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