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름이 없어! 그런데 심장은 있어!”

명찰 바꿔달고 출동해야 하는 마이너들의 엘레지

by 마혼

<마혼의 Stage & Age 10>


나도 저래봤으면, 하는 이가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개천에서 용나듯 고등학생 때 희곡 하나 달랑 써서 상받고 데뷔하더니, 버릴까 하다가 올린 연극이 대박이 나서 극장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극장 앞에 전차가 못다닐 지경이 되자 미녀까지 얻는다. 당대의 작품 하나로 국민배우 문예봉을 홀라당 나꿔챈 이, 임선규. 물론 후에 문예봉이 월북하자 같이 월북해 결국 북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긴 했지만 애니웨이, 주제곡보다 삽입곡인 ‘홍도야 우지마라’가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원래 제목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더해 제목 두 개로 이름표 바꿔달며 올라가는 지경.


때는 일제 강점기, 곳은 경성 최고의 요정집 ‘청운각’. 오늘따라 이곳은 더없이 분주한데 경성최고의 부잣집 아들로 일본유학길에 올랐던 영호의 금의환향 대환장 파티가 열리기 때문. 그러나 할 일이, 할 공부가 더 태산같은 영호는 그만 마담 피셜 ‘갓 영근 앵두’같은 신입 기생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래서 질퍽댄다.


영호 : 내 젊은 시절 갈망했던 작은 희망이 창백한 배꽃으로 나타난, 이 기묘한 인연은 무엇이요?

홍도 : 그저 술시중드는 계집에게 하는 희롱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어요...


한편 옛 국어책에나 나올 법한 이름의 철수와 순이는 달동네에 사는 중. 단, 사이좋은 연인 아닌 사이좋은 오누이인데 집이 가난해 오빠가 학업을 중단해야하는 안타까운 형편. 그래서 소녀 순이는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똑똑한 오빠가 학교를 계속 다녀 판검사가 돼야 한다.


현실에선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오빤 법대 들어가고 동생은 보람 느끼면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 그러나 드라마는 이렇게 쓰면 쓰레기통에 꽂히는 게 국룰이라 자연스럽게 ‘전개’가 벌리는데, 상사병에 제대로 걸린 영호는 결혼을 마음먹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거기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영호 : 어? 철수 아닌가?”

철수 : 어? 영호. 귀국했단 이야기는 동창들에게 들었네. 환영회 못가서 미안해.... 그런데 여긴...?”


그리고 이내 집으로 돌아오는 철수의 여동생. 영호가 사랑에 빠진 그녀, 명찰 따로 만들어 밤마다 홍등가로 출동하던 순이 아니, 홍도였다. 둘이 만났던 그 날은 순이의 홍도 데뷔날이었던 것. 여기서부터가 감히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카프리치오소’에 견주는 변화무쌍 ‘위기’ 시작.


영호는 부모의, 특히 엄마와 여동생의 극악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그러나 며느리를 여전히 술집 아이로 보는 시어머니.


모친 : 네놈 눈이 뒤집어져 능구렁이가 비단붕어로 보일지 모르지만 걸레는 빨아도 걸레야!

영호 : 어머니, 왜 자꾸 그러세요!


그럭저럭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구박않고 아이까지 낳게 되자 홍도는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영호가 1년짜리 단기외국 유학을 떠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기다렸다는 듯 아침드라마 뺨치는 작전에 돌입한다. 영호의 편지를 빼돌리더니 급기야 가짜편지를 만들어 홍도를 바람피우는 여자로 만들어버린다. 아이는 뺏고 홍도는 내쫒는다. 졸지에 다시 화냥년이 돼버린 홍도.


유학에서 돌아온 영호는 햄릿이 돼버린다. 사느냐 죽느냐 골라야하는 그는 결국 홍도를 버리고 부잣집 딸을 새로 고른다. 아이라도 찾으리라 영호의 귀국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던 홍도는 영호의 집으로 찾아가는데 하필 그날은 영호의 생일이자 약혼식날. 마당에 들어선 홍도는 아이 울음소리가 나자 젖이라도 물리게 해달라 애원하지만 모두가 내쫒기만 하니 꼭지가 돌아버린다. 얼떨결에 그 약혼녀를 칼로 찌르게 된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검사는 다름 아닌 홍도 덕에 가난한 고학생에서 검사로 이름표 바꿔 단 오빠 철수.


그리고.


“도대체 배우들은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워?”

술자리에서도 흔히 돌게 마련인 질문. 그러나 쪽대본 받아가며 몇 시간뒤에 바로 촬영들어가야 하는 연장된 드라마의 경우를 빼면 이 말은 맞는 말이 아닌데, 대사는 ‘외우는’ 것이 아닌 ‘외워지는 것’이기 때문. 특히 무대에 서는 배우는 죽으나 사나 대본 끼고 사는 숙명이라 대사는 절로 외워지는 편.


그럼에도 이건 좀 부러 외워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을 더해주는 연극 하나 있으니, 줄기차게 흑인들의 인권에 천착해온 작가 에이솔 후가드 Athol Fugard 작 ‘시즈위 밴지는 죽었다 Sizwe Banzi is Dead’이다. 시작부터 장장 A4용지로만 12장 짜리 장대사가 나오니 말이다. 1972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프리미어 올라간 이 연극은 현지 흑인 배우 두 명이 출연했다.


넬슨 만델라도 나오기 전, 흑인이 짐승취급 받던 시절 남아프리카 어느 사진관. 이 곳을 운영하는 흑인 ‘스타일즈’는 가게를 막 열고 앉아 신문을 편다. 공장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자기가 다니던 공장 이야기부터 돼지우리같던 이 곳을 싸게 인수해 사진관으로 리노베이션한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그래서인지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그는 우쭐하다.


“여긴 귀중품 보관실이라구요. 꿈을 보관하는 곳.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내 방식대로 그들의 꿈과 희망을 인화지에 박아주는 거죠.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그들을 기억할 수 있게요.”


그는 신이 난 듯 그간 찍은 사진들을 자랑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너스레 하나를 더 얹는다.


“자, 꿈 하나 또 들어오시고!”


빼꼼 고개 들이민 그 꿈은 바로 흑인남자. 그는 아내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러 왔다. 이 때부터는 그의 히스토리. 그 남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 네 명을 위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려 대도시로 왔는데 우선 구직허가를 받아야 하는 형편. 그러나 하필 그 때 불시검문에 걸린 그는 구직허가는 커녕 통행증에 낙인이 찍혀 원래 거주지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 그러나 그곳은 일자리가 아예 없는 곳. 어떻게든 대도시에 남아야 하는 이 남잔 빌붙어 살던 집 남자 ‘분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둘은 머리를 짜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친구, 우리가 유일하게 평화로울 때는 저 백인들이 무덤을 파서 우리 얼굴을 땅속에 쳐박을 때 뿐이라구.”


현실만 콕콕 찔러대던 분투는 미안했는지 남자에게 위로주를 사준다. 한바탕 술을 마시고 나와 소변을 보러 골목에 들어간 분투는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갱단에게 맞아죽은 흑인 시체를 발견한다. 우선 통행증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그런데 그는 구직허가를 가지고 있는 독신남성. 분투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 바꿔 붙이더니 남자에게 안겨준다.


남 자 : 우리 집사람은 어쩌고?

분 투 : 자네 아내가 뭐?

남 자 :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 시즈위 밴지가 죽는 거잖아.

분 투 : 그게 뭐? 더 좋은 남자한테 시집갈텐데.

남 자 : (고개를 들며) 뭐? 누구?

분 투 : 자네 말이야... 로버트.


그래서 원래 시즈위 밴지였던 이 남자는 그때부터 로버트로 이름표를 바꿔 달더니 로버트의 원주민 등록번호를 외운다. 그러나 여전히 켕기는 로버트, 아니 밴지.


분 투 : 자네가 말썽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 하지만 말썽이 나면 전과조회를 하려고 지문을 조사해... 그러면 시즈위 밴지는 다시 살아나니까 조심해.

남 자 : 흑인이 말썽을 피한다고? 불가능해, 분투. 우린 피부색부터가 말썽인데.

분 투 : (지쳐서) 자네가 해보겠다고 했어.

남 자 : ... 그래, 알았어.


그렇게 취직이 된 밴지, 아니 로버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거기에 돈과 사진을 동봉할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다.


스타일즈 : 그대로요, 로버트! 움직이지 말구요. 한번만 더요. 이제 웃어요, 로버트, 웃어요! 웃어요....


자, 그럼 당신은? 이름표 한 번 바꿔 달고 싶은가? 아니면 두 개 달고 싶은가? 이러든 저러든 오버로크는 제대로 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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