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좀 해보자니까!”

소외되기 싫어 소통에 목숨 걸다 소동 일으키는 군상들

by 마혼

< 마혼의 Stage & Age 2>


1928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올비. 재미있는 작품 많이 남기고 아쉽게도 5년전쯤 세상을 떴다. 그 중 대표작 1958년 쓰여진 ‘동물원이야기’. 그러나 이 작품엔 동물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대수로우면서 보이는 오브제와 의미심장하면서 보이지 않는 오브제가 하나씩 나온다. 전자는 벤치요, 후자는 개. 그리고 등장인물도 고작 둘. 고작 둘이라고 표현했지만 한 명 혹은 두 명 나오는 연극은 배우 입장에서는 에베레스트와 같다. 연출자 입장에서는 몇 명씩 나오는 작품보다야 동선긋기도 편하고 다루기 쉬운 만큼 꼭 도전해보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배우는 다르다. 도전해보고 싶어한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와 끌고가는 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이 작품을 제대로 살려낸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는 말이다.


둘만 나오니 이야기도 단출하다. 주말의 뉴욕 어느 공원. 시작부터 제리는 자기가 동물원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있는 피터에게 무작정 말을 건다. 별로 듣고싶지 않은 말을 자꾸 해대는 제리와 그냥 가만히 책만 보고싶은 피터가 한동안 대치한다. 잠시 후 제리는 뜬금없이 자기가 사는 집 건물에 있는 개 이야기를 해대는데, 잘하면 압권이요 못하면 쫄딱 망하는 부분인 요 장대사가 실로 경이롭다. A4용지로 너댓장이나 되는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이 개 이야기를 통해 제리는 자기가 얼마나 소통하고 싶은지, 하다 하다 개와도 소통을 시도하고, 지극정성 쥐약으로 버무린 수제 햄버거를 만들어 끝내 소통하기 싫어하는 개를 죽이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그 개가 좀 나아졌다는 얘길 하숙집 여주인에게 들은 뒤라, 난 그 놈이 날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 뭐랄까... 내 마음이 끌렸다고나 할까? 아니, 그게 아니지… 가슴이 시릴 정도로 만나보고 싶은, 바로 그거. 난 가슴이 시릴 정도로 '내 친구'를 다시 만나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 (피터는 조소하는 듯한 반응) 그래, 피터, 그 놈은 친구였어.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야. 내겐 친구같은 그 개를 난 진심으로 다시 만나봐야 했어. “


결국 동물하고도 소통이 제대로 안됐다는 피눈물나는 고백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원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그 때문.


하지만 이런 식의 소통이 피터에게 먹힐리 만무하다. 준열해서 더 그렇다. 피터 역시 소통하기 싫어서 벤치로 도망나온 인물이기 때문. 멀쩡하게 가족이 있음에도 말이다. 이를 너무나 잘 알게 된 제리는 결국 피터에게서 벤치를 빼앗는 것으로 소통을 대신한다. 이런 시도를 너무나 잘 모르는 피터는 벤치를 뺏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게되고 결국 제리는 칼을 꺼낸다. 그리고 엉겁결에 피터가 든 칼에 자신의 배를 찔러대고선 피터에게 얼른 자리를 뜨란다. 그리고 제리는 웃으며 너도 이제 동물이 된 거라며, 고맙다며, 죽어간다. 최후의 소통.


그리고.


딱 2년 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해롤드 핀터. 많은 그의 작품 중 1996년 런던 앰버서더극장에서 초연된 ‘재는 재로 Ashes to Ashes’라는 작품. 우리나라에선 2002년쯤 초연됐다. 이 제목은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장례식에서 흔히 하는 말 ‘Ashes to Ashes, Dust to Dust’에서 따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혀 위로가 안된다. 오히려 화를 돋운다. 부조리극의 계승자답게 모호한 대사도 더욱 그렇다. 게다가 주먹 한 방 안 날리고도 온통 일방적인 폭력의 소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조리극의 재미가 하나 있으니 조리가 맞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 그 간단한 예.


A : 밥 먹었어?

B : 구름이 예쁘더라...


어처구니없다. 이런 식으로 한 시간 반복되면 지루해서 못 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말이다.... B가 구름이 예쁘다고 한게 터무니없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B는 밥을 못 먹고 솜사탕을 사먹었다. 그런데 솜사탕을 보며 구름이 떠올려진 순수한 영혼의 B는 메타포를 넣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대답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모든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에는 ‘찾아내는 맛’이란 게 있다. 화가는 빛과 색을 찾아다니고 배우는 왜 그 연기인지를 찾아다닌다. 이거 빼면 예술 아니다. 따라서 부조리극 역시 연출이나 배우에게 요 맛은 일부 있다. 하지만, 다 찾아냈다한들 그걸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해야하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명은 별개문제라 죽을 맛이다. 왜? 다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적당한 타협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위장하거나 좀 더 현실적으로 틀거나.


다행히 이 작품은 남자가 처음부터 폭력의 주체임을 자처하고 나선데다 상대는 여린 여자. 얼핏 사랑싸움과 애정공세인 척 당의정으로 만들어져있어 그런대로 긴장감이 깔린다. 출연진 두 명의 이름도 미녀와 야수. 여자는 딱 여주인공 이름인 레베카 Rebeca요 남자는 데블린 Devlin. 남자의 이름만 유독 ‘악마’같은 이유는 그가 악마같은 가학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인지 고문인지 모를 말들이 무자비하게 레베카에게 건너간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장 설득력있는 건, 유대인인데다 2차세계대전을 겪은 핀터에게 정신병적으로 나치의 잔악성이 각인됐다는 사실이다. 실제 그는 히틀러의 설계자인 나치전범이 쓴 전기를 읽고나서 이 작품을 썼다. 그래서 데블린은 레베카에게 홀로코스트를 감행하는 폭력의 화신이며 레베카는 홀로, 그야말로 홀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다. 그래서 레베카는 첫 대사부터가 폭력의 간증이다.


“그런데... 예를 들면... 날 내려다보고 서서 그는 주먹을 쥐곤 했어. 그리고 다른 손을 내 목에 갖다대고 내 목을 꼭 잡아서 내 머리를 그에게 향하게 했어. 그의 주먹이... 내 입에 가볍게 스쳤어. 그리고 그는 말하곤 했어. ‘내 주먹에 키스해’ 라고.”


그리고 저자 핀터가 ‘나치들이 총검 끝으로 아기를 들어 창밖에 버리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고 말한 것처럼 레베카의 마지막 대사 역시 아기로 끝난다.


“그 어떤 아기에 대해서도 난 아는 게 없어.”


둘 중 하나다. 어떻게든 소통하려 발악하거나 아니면 배설을 뱉어낸 자만 시원해지는 소통. 그 사연많은 칼이 배에 꽂히는 것도 소통이고, 그 사정없는 말이 등에 꽂히는 것도 소통이니 말이다.


자, 그럼 당신은? 흐흣, 혹시 땡스타그램이나 페이스땡 같은데서 매일 그러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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