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직하게 살아보라구?
작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에 관한 고찰
< 마혼의 Stage & Age 3>
바람에 날리는 치마로 유명한 배우 마릴린 먼로의 전 남편이자 천재 극작가 아서 밀러가 쓰고, 후에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날리는 엘리아 카잔이 연출해 1949년 뉴욕에서 초연된, 정직한 제목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 .
36년간 길바닥에서 돈만 벌었다. 외판원을 업으로 삼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속 ‘작디 작은’ 아버지 윌리 로먼은 회사 외판원. 평생을 차를 몰고 미국 전역을 누비며 물건을 팔러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능력도 떨어지고 인맥도 끊어졌다. 정작 회사에서 임금을 못 받는 형편이 되자 친구 찰리에게 매주 돈을 빌려 몰래 생활비로 때우는 처지.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아이들에게 기대가 크다. 특히 큰아들 비프에게 마음을 기대며 공을 들인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은 허사. 도벽증세가 생기는 등 이상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아버지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비프는 엇나가기 시작한다. 아내 린다는 그래도 아버지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살았다며 그런 그를 존경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 말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
“생각해 봐. 한 푼도 못 벌고 그 먼 길을 돌아올 때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니? 당연히 혼잣말이 많아질 수 밖에. (중략) 아버지가 인격이 없다고? 너희들을 위해 평생 뼈빠지게 일한 건 누구니?”
어느덧 (작금의 80처럼) 60이 넘어버린 윌리 로먼. 그러나 이제 열심히 일한 댓가로 환각을 겪고 정신착란까지 생기는 등 직업병만 남았다. 아, 남은 게 또 있다. 착한 아내와 어느덧 훌쩍 커버린 두 아들, 그리고 할부금. 그러나 자식들도 변변치 않게 되긴 마찬가지. 큰아들 비프는 한때 촉망받는 미식축구선수였으나 이제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가 돼버렸다. 둘째 해피 역시 여자 뒤꽁무니만 좆는 신세. 윌리는 부서를 바꿔볼 생각을 하며 새출발을 다짐해보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회사에서 잘린다. 비프는 윌리에게 아버지나 나나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며 흐느낀다. 이렇게 된 아들이 나 때문인가... 죄책감이 깊어지는 아버지 윌리는 더 이상 삶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윌리의 눈에 보인 것은 죽음. 보험금이나마 아들에게 남기고 싶었나보다... 그는 기어이 자동차 사고를 낸다. 피를 토한다.
그리고.
1975년인가 에쿠우스 초연 때 앨런 역으로 일약 ‘일류배우’가 돼버린 배우 故 강태기로부터 지금은 탤런트로 활약하는 최일화 등 많은 배우들이 만지고 지나간 작품. 극단 미연의 김순영이 쓰고 연출해 2004년 초연한 연극 ‘삼류배우’.
30년간 극장에서 단역으로만 무대에 올랐다. 연기를 업으로 삼고. 연극 ‘삼류배우’속 ‘작디 작은’ 아버지 이영진은 30년 동안 단역만 맡아온 마흔아홉살의 연극배우. 그러나 평소 일류직업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영진의 평생 소원은 햄릿 역을 해보는 것.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이영진의 아내는 미용실을 운영하며 남편을 믿고 그를 응원하는 유일한 지원군이다. 하지만 대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은 아빠가 무명배우라는 것이 그리 탐탁치도 않고 매력도 없다고 여길 만큼 커버렸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시가 찾아온다. 마침, 딱, 극단에서 ‘햄릿’공연을 준비한다는 소식. 이영진은 흥분한다. 그리고 햄릿역에 도전한다. 극단에 통사정을 하고 결국 그는 30년 만에 햄릿 역을 따낸다. 이영진의 아내와 아들, 딸 모두 기대가 커졌다. 그런 식구들 앞에서 이영진은 밤마다 햄릿 연습을 해댄다. 안 그래도 개달달 외우고 다니던 햄릿의 대사를 후덜덜 더 박아버린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하필 이영진의 극단친구이자 지금은 TV스타가 돼버린 전상일에게 햄릿역을 맡기기로 캐스팅이 바뀐다. 다 큰 아들, 딸들이 흔히 아빠에게 바라는 경제력. 그 경제력 없음이 여기서도 이영진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햄릿역을 하면 표가 안팔린다는 뻔하고도 뻔뻔한 사실에 제작자가 방향을 틀어버린 것.
‘한 번만 시켜주지. 잘할 수 있는데...’
이영진은 눈물을 삼킨다. 막 잡고 세 번은 울어야 배우가 된다는 전설속의 구전을 몸으로 보여준다. 한편 돈 벌고 인기 얻고 빽도 있는 스타 전상일. 오랜만에 소극장 나들이(?) 나오신 전상일은 아쉬울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왕이 평민의 집에 들어왔으니 오직 대접만 바랄 뿐. 덩달아 다른 캐릭터들은 그를 모시기에 바빠진다. 그가 입을 열수록 이영진은 비참해져만 가고 그가 움직일수록 이영진은 더 작아져만 간다.
그런데 장난같은 일이 벌어진다. 공연이 한창이던 어느 날, 전상일이 TV스케줄 때문에 못 올 지경이 됐다.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던가. 마침 햄릿 대사를 자기 대사처럼 외우고 있던 이영진에게 기회가 찾아간다. 단 한 번의 공연에 불과하지만 이영진에게 햄릿 역이 주어진 것.
일생 처음인 이영진의 주연 연기. 온가족이 공연시간에 맞춰 객석에 앉았다. 그러나 이 무슨 개같은 경우! 공연 직전 기적처럼 전상일이 공연시간에 맞춰 극장에 들어서고 끝내 이영진은 관객 앞에서 햄릿 역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실망한 아들은 아빠가 하는 햄릿을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더 작은 사람이 돼버린 이영진. 그러나 이영진의 눈에 보인 것은 다시 무대. 빈 극장에서 딱 세 명의 관객만 앉혀놓고 기어이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땀을 토한다.
평생을 정직하게 살면서 돈만 벌어온 아버지, 그리고 평생을 정직하게 살면서 돈만 못 번 아버지. 이런 사람들이 보는 것은 결국 죽음일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일까? 어차피 둘 중 하나다. 열심히 살다가 또 열심히 죽든가, 열심히 살다가 또 열심히 살 뿐이든가.
자, 그럼 당신은? 열심히 살았는데 보이는 것이 없는가? 아니면 대충 살았는데 뭐가 막 보이는가? 보이는 게 없는 것도, 뭐가 막 보이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한 두 사람은 보여야 할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