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것
회사를 다니면 그런 게 있다.
한번 호구 잡히면 계속 호구다.
회사원이라면 특히 디자이너라면 저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왜?
시답잖은 거 한번 수정해주면
그게 지 권리인 줄 아는 호이둘리들이 아주 적반하장 고추장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근데 또 디자이너도 사람인지라
어떤 날은 작은 일에도 화가 나는가 하면
어떤 날은 웬만한 일에는 또 관대하게 넘어가기도 하는데
최근 나는 관용을 베풀다 둘리를 만났다.
시시콜콜한 수정이야 요즘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지난 어느 날
전날 또 되지도 않는 문구 수정을 해주고 출근하자마자 메신저가 왔다.
'어제 수정주신 거 문구 처음으로 돌려놔주세요.'
솔직히 이건 태도의 문제다. 태도!
자기가 남에게 하지 않아도 될 추가적 노동을 하게 했으면
또 그걸 다시 처음으로 돌릴 거면
인간이 최소한의 상식과 인생을 살아오며 배운 예의라는 게 있다면
적어도
'죄송한데 문구 처음에 들어갔던 대로 다시 넣어 주실 수 있을까요?'
저 정도로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근데 '처음으로 돌려놔주세요.'
내가 바꾸자고 했냐? 지가 바꿔놓고 저 말투는 뭐야?
순간 차오르는 빡침을 참으며
최근에 최종본 넘긴 뒤로 수정이 너무 잦으니 처음에 잘 컨펌해서 문구 보내달라고 했더니
자기네 부서가 일이 바쁘고 변동사항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왜 이해를 못하냐는 식으로 힐난을 가득 담은 개소리스러운 답장을 받았다.
지는 툭 던져주고 내일까지 해달라는 게 다반사면서
문구 한 번 제대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지네 부서의 섭리를 이해하라느니 관련 규정에 따라 적는건데
네가 뭘 아냐는 식으로 텍스트에 정색을 가득 발라서
한바탕 혼자 지껄이다 한참 답장이 돌아오지 않자
(대답할 가치도 없어서 그냥 보고있었다.)
그 짧은 새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 건지
갑자기 수그리고 잘 협의해보겠다고 한다.
아니 근데 예를 들면
'컬링 최고 마스카라!' 이 문구를 '속눈썹엔 최강 컬링 마스카라!'
이딴식으로 바꾸는데 그렇게 온 팀이 들러붙어서 협의하면서
최종본이 넘어가기 전까지도 정하지 못할 일인건가..?
그래.. 이게 다 내 잘못이지..
좋게 좋게 해 보자고 초반에 군말 없이 해준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이 사건에 통쾌한 결말따위는 없다.
팀원이 겪는 부조리에 관심 없는 상사를 둔 짜바리 하층민인 나는
굳이 직급이 높은 갑질순이호이에게 굳이 더 따지지 않았고
오늘도 패배했다.